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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May 31. 2020

달콤쌉싸름한 시험의 세계

이제 학생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야 

 미루고 미루던 대학원 외국어 시험과 종합 시험을 오늘 다 치르고 왔다! 


 내 마음이라는 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덕스러운지, 굳은 결심과 함께 대학원에 입학한 지 한 학기도 채 되지 않아 공부하기 싫다, 귀찮다, 수업이 실망스럽다는 불만만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도 소심한 탓에 차마 결석도 하지 못하고 입만 툭 튀어 나와서는 꾸역꾸역 강의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작년에 휴학을 했다가 미룰수록 더 하기 싫어지지 않을까 싶어 이번 학기 복학을 신청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원격으로만 수업이 진행된다니 아쉽다고 말하면서도 내심 땡 잡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강의실에 가는 것보다 원격 수업을 듣는 게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니까. 퇴근 후 교수님 얼굴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나도 모르게 딴짓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아이들의 마음이 더 가까이 느껴졌다. 


 D-4+ 근거 없는 자신감 발동 


 나는 먼저 졸업한 동기 선생님으로부터 받아 잘 저장해 놓았던 종합 시험 자료를 같은 학기 선생님들 카톡방에 보내기도 하고 복학생으로서 알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공유했다. 내 대학원 전공은 상담 심리. 예상 문제를 눈으로 쭉 훑어보며 그냥 그 시간에 집중해서 글짓기를 해보지 뭐, 근거 없는 자신감을 발동시켰다. 종합 시험보다는 외국어 시험이 걱정됐는데 대학교 1학년 때 토익 점수를 겨우 졸업 요건에 맞춰놓은 이후로 영어와는 아주 단단한 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 도움이 오고 가는 따뜻한 곳! 한 영어 선생님이 예상 지문을 다 번역해서 올려주셨다. 이것만 대충 읽어보면 되겠지. 차곡차곡 모은 자료를 깔끔하게 출력해 노트북 옆에 펴놓았다. 책상 위에 정리한 자료가 있을 뿐인데 마음이 이렇게 든든할 수가! 




D-3 최초의 1인은 안 돼! 


 수험 번호를 확인하라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홈페이지에서 엑셀 파일을 열어 봤는데 내 수험 번호가 1번이었다! 우리 과에서 응시 인원이 단 6명뿐. 뭔가 이상한데 어떻게 된 거지? 알고 보니 외국어 시험은 2학차 때부터 응시가 가능해서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이미 시험을 다 보신 거였다. 재작년에 동기들이 외국어 시험을 볼 때 나는 응시하지 않았었지. 그때 봤으면 지금은 종합 시험에만 집중하면 되니 편했을 텐데 싶은 뒤늦은 후회가 잠시 몰려왔다. 그러다가 시험장 풍경을 상상해 보는데, 6명이 한 교실에 그리고 내가 맨 앞에 앉아 있을 거라니 왠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6명 중에 영어 선생님이 몇 명 있을 거고 그 분들은 당연히 영어를 잘하시겠지? 



 점심 시간에 나름 집중해서 예상 지문 번역본을 한 번 읽어봤는데 무슨 말인지 당최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겐 소재도 생소한 데다가 직역체의 말투가 도저히 내 머리에 다가오질 않는다. 같은 교무실에 대학원 선배 부장님께 이런 걱정을 털어놓으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떨어지면 아마 그 대학원에서 최초일 거예요."


 웬만하면 다 합격한다는 말로 이해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같이 웃었다. 그러고 다시 고개를 숙여 영어 지문을 보는데 갑자기 내가 그 최초의 1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공포가 몰려온다. 나는 그렇게 톡톡 튀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는 않다! 어려운 내용에 하기 싫은 마음까지 더해져 읽히지 않았던 지문이 이제야 다가오기 시작했다. 



 D-2 체력을 비축해 놓는 날 


 오랜만에 아이들이 등장한 학교 생활과 대학원 시험까지 신경을 써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피곤한 느낌이었다. 내일은 시험 하루 전날이라 늦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니 오늘은 체력을 비축해 놓을 필요가 있다. 



 D-1 시험 전날엔 할 일이 많아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시험 준비를 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시험을 볼 때마다 꼭 초콜릿을 챙긴다. 당분이 보충되어야 머리가 잘 돌아간다는 말을 들은 이후부터였던 것 같은데, 막상 시험장에서는 초콜릿을 먹을 여유가 없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준비를 해야지. 장바구니에 초콜릿이 쌓여가는 게 왠지 머리에 지식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집에 와서 휴대폰을 보다가 브런치 통계를 봤는데 브런치북이 어딘가 노출이 되고 있는지 투데이가 쑥쑥 올라가기 시작했다. 작년에 쓴 글을 다시 읽어 보고 싶어 소파에 앉은 채로 내 브런치북을 정주행했다. 한 편만 더 보자, 이건 무슨 내용이었지?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머릿속엔 끝없는 의문이 펼쳐진다. 아니, 내일 오전에 시험 보러 가야 하는데 왜 갑자기 평소엔 하지 않던 내 브런치북 정주행? 


 퇴근하고 돌아온 남편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고 잠시 식탁에서 공부를 하다가 카톡을 확인하니 부산에 고등학생 확진. 오늘은 뉴스를 안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다.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자리를 옮겨 뉴스를 틀고 휴대폰으로는 인터넷 기사를 검색했다. 오늘도 기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멈출 수가 없구나. 그런데 내일 시험이 끝나고는 뭘 먹을까? 이번엔 대학원 근처 맛집 검색을 또 시작했다. 근처 맛집 리스트 중에 불고기, 파스타, 탕수육? 고르기가 어려운데 선택권은 남편에게 넘기기로 하고 나는 고민을 그만 끝내야겠다. 대신 뭘 먹든 후식으로는 아이스크림을 꼭 먹는 걸로. 


 시험장에 가져갈 자료를 순서대로 정리하며 빨간펜으로 과목과 예상 문제, 소제목 부분을 겹겹이 동그라미 쳤다. 이렇게만 표시해도 뭔가 굉장히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은 느낌이. 최후의 방법, 발달 단계 같은 건 그냥 앞글자만 외우자. 뒷글자는 시험장에서 생각이 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맑은 정신으로 시험을 보기 위해 시험 전날은 일찍 잠들어야 한다. 잠깐, 어제 한 말이랑 다르잖아? 




 D-day 시험 시간이 중요한 거지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혼자 거실을 두어 바퀴 돌다가 어젯밤에 챙겨놓은 자료를 다시 꺼내봤다. 밤새 정신이 너무 맑아졌는지 밑줄친 내용이 마냥 새롭기만 하다.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시험을 잘 보라는 의미로 미역국을 끓여줬다. 이 아침밥을 먹고 나면 시험을 보러 가야 한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아직 훑어보지도 못한 부분이 있는데 어쩔 수 없다. 시험장에 가서 보는 수밖에. 괜히 부작용이 있을 수 있으니 차에서는 절대 공부하지 않겠다. 10분 정도 시험장에 일찍 도착해서 자료를 훑어보고 있는데 벌써 다 집어 넣으라니 어쩔 수 없다. 아직 못 본 부분은 시험 시간에 어떻게든 해결해보는 수밖에.


 결국 시험장에서는 가져간 초콜릿을 하나도 먹지 못했다. 시험이 끝나고 남편 차에 타서야 초콜릿을 하나씩 까먹기 시작했다. 신경쓰던 시험이 끝나서인지 초콜릿이 더욱 더 달콤하게만 느껴진다. 여태까지 숱하게 많은 시험들을 봐왔지만 시험이라는 건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는구나. 이제 더이상 시험에 들지 않기를 바라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또 스스로 시험에 걸려 드는 나. 미루고 미루는 것도, 시험 기간엔 평소보다 더 많이 자는 것도, 시험 전날이 되면 딴짓을 더 많이 하는 것도 오래 전 기억 속 시험 기간 내 모습과 똑같다. 입속에 초콜릿이 달콤하게 느껴져 창밖을 보며 미소 지어본다. 이런 내가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는 게 정말 다행일 뿐이다. 


시험이 끝난 내게 주는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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