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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리조 Aug 21. 2020

떠오르지 않는 추억을 마주한 기분

영자의 전성시대는 아닌데 

 가끔씩 어린 시절의 나를 떠올릴 때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리움보단 안타까움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사진 속에, 일기장 속에 남아있는 어린 내가 좋아서 자꾸만 보고 싶어진다. 단편적으로 남겨진 흔적들을 마주하며 어떻게 이렇게 예쁘고 기특하냐며 혼자 감탄하고는 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알게 모르게 내가 나를 꽤 많이 좋아하나 보다. 




 결혼하고 부모님 집에서 가져온 박스 안에 비디오가 다섯 개 있었다. 언제 찍은 건지 기억도 전혀 없었다. 요즘 시대에 비디오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부산에 다녀올 때마다 남편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부산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으니 내 비디오를 가져와서 같이 볼걸 그랬다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몇 달에 한 번씩 부산에 내려갈 때마다 그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사실 시부모님이랑 나의 어린 시절을 같이 보는 장면이 썩 내키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부산에 가면서 정말 비디오를 챙겨 가게 되었다! 다들 거실에서 다른 일에 몰두하실 때 남편을 방으로 불러 비디오를 틀어 달라고 했다. 그 옛날처럼 비디오 플레이어 속으로 까만 비디오가 쏘옥 들어갔다. 잠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더니 비디오가 씹히면서 지지직하는 소리만 났다. 드라이버로 비디오 플레이어를 열어서 씹힌 부분을 끄집어내고 클리너를 돌려도 마찬가지였다. 비디오도, 플레이어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채로 먼지만 맞으면서 너무 오랜 세월을 지나온 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원래 비디오를 볼 생각도 없었으면서 보려다가 못 보게 되니 진심으로 아쉬워졌다. 


 남편이 비디오를 꺼내 주면서 업체에 맡겨서 영상을 받아보자고 했다. 올해 생일 선물로 그걸 해주겠다나(우리는 이런 헛소리를 많이 한다. 얼마 전엔 냉면 10인분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뭐라나. 인터넷을 찾아보니 비디오를 변환해주는 업체가 꽤 많이 있었다. 몰랐던 세계였다. 손상된 비디오테이프도 복원이 가능하다는 설명이 있었고 생각보다 돈도 시간도 많이 들지 않았다. 이럴 땐 정말 과학 기술에 절이라도 올리고 싶어진다. 


 택배로 비디오를 보낸 지 1주일도 채 되지 않아 영상을 받아볼 수 있었다. 오늘 하루는 비디오를 보다가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섯 개 중에 하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부 영화가 1시간 넘게 녹화되어 있었고, 하나는 엘지 트윈스 야구 경기가 나오다가 홈런왕 강속구로 넘어갔다. 뭔지 몰라서 이 두 비디오도 변환하는 비용을 냈으니 결과적으로 돈을 좀 날린 셈이다. 남은 3개 중에 2개는 유치원에서 찍어준 것이었고 1개는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찍어준 것이었다. 


 안 그래도 내성적이고 부끄러움 많았던 내 앞에 카메라까지 들이댔으니 어린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손가락을 입에 넣고 이리저리 눈알만 굴렸다. 예나 지금이나 활달한 오빠가 카메라 앞에서 말을 하고 노래도 부르자 눈치를 보다가 한 마디씩 따라 하는 정도였다. 어릴 때 집에서 별명이 '따라쟁이'였던 이유가 있었다. 처음으로 마주한 어린 시절의 내 목소리는 오빠가 하는 말을 조그맣게 메아리처럼 따라 하고만 있었다. 


 제법 의젓한 모습으로 유치원에 다니던 내 모습도 비디오에 담겨 있었다. 노래 축제에 오셨던 엄마는 유치원 원장님의 질문에 내가 요즘 많이 의젓해졌고 똘똘해졌다는 대답을 하셨다. 지금의 나보다도 젊은 나이의 엄마 모습이 화면 너머로 전해졌다. 화질이 선명하지 않았지만 기억을 더해 그 당시 엄마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잘하는 건 줄 알고 노래를 부를 때면 머리를 양옆으로 흔들었나 보다. 조금 모자란 아이처럼 보여서 혼자 있는데도 참으로 민망하다 이거. 


 유치원 영상에서 내가 있는 곳 가까이에는 익숙한 얼굴의 선생님이 늘 서 계신다. 한 번도 잊어본 적 없는 이름, 윤미란 선생님. 많아봐야 20대 중후반 정도밖에 되지 않으셨던 것 같은 선생님은 기억 속에서 항상 웃는 얼굴이다. 나의 유치원 시기를 책임져 주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인데 졸업식 날부터 뵐 수 없었다. 윤미란 선생님은 우리 유치원 졸업식 날 새벽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누구에게 어떻게 그 소식을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에 우리 졸업반 친구들 이름을 말씀하셨다고 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선생님의 마지막에도 눈에 아른거렸을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결혼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하얀 얼굴의 선생님이 우리 졸업식 날에 돌아가신 건 정말 사실일까. 사실이 아니라면 좋겠다. 




 '부페 파티'라는 행사를 하면서(그 당시 진짜 행사 이름) 남학생과 손을 잡고 레드 카펫을 밟으며 들어왔다.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하기 전에 서로 인사를 하는데 고개를 숙이는 순간 어딘가에서 찰칵하고 사진 찍는 소리가 났다. 아, 앨범에서 많이 본 그 장면이 이렇게 찍힌 거였구나. 영상에는 사진으로는 만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내 소리와 움직임이 담겨 있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우며 집중했다. 내가 겪은 일이라고 해도 아무리 집중을 하고 오만 가지 방법을 사용해도 떠올릴 수 없는 기억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유치원 영상의 시작 부분에 당시 유치원 건물이 나오면서 동네가 잠깐 비치는데 이게 좀, 어라 이상하다. 90년대 초반 서울의 모습을 보는데 마치 영자의 전성시대를 보는 느낌이다. 그 시간 안에서 한 번도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온통 다 촌스럽게만 보인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나 보다. 먼 훗날 언젠가 젊은 시절을 떠올려보고 싶을 때 근거가 되는 자료를 좀 더 성실하게 남겨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늘은 비디오 영상을 한 번 더 보는 걸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한때 나의 소속이었던 무지개 유치원


춤추고 노래하고 있는 내 모습, 그리고 그 옆엔 늘 같은 선생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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