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자해 청소년이었다
생각보다 자해하는 청소년이 많다. 통계적으로 역시나 중2-3의 비율이 가장 높다. 자해는 여학생들이 더 많이 하는 편인데 자살은 남학생의 비율이 약간 더 높다고 한다.
나는 유난히 겁이 많고 엄살이 심해서 상처도 잘 보지 못하는 편이다. 나이를 먹으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여전히 똑같다. 반 아이가 바느질로 손에 무늬를 낸 것을 확인했을 때, 손목에 칭칭 감고 있는 휴지 뒤로 뻘건 칼집을 발견했을 때, 콩알만 해진 간덩이는 손목 보호대를 한 아이 곁을 스치기만 해도 쿵 내려앉았다. 마음이 힘든 걸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왜 몸까지 더 힘들어질 행동을 하는 건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 자해를 했던 아이들과 전문가가 나와서 하는 말들을 정리하니 자해를 하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살고 싶어서'로 정리가 됐다. 어떤 전문가는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자해도 하나의 표현이니, 표현하지 않는 것보다는 건강한 상태라고 말했다.
나도 자해 청소년이었다는 사실을 청소년 시기가 한참 지난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칼을 무서워하는 나는 칼로 내 몸에 상처를 낸 적은 결코 한 번도 없었지만, 자해의 종류를 읽다가 세 가지나 해당 사항을 찾아버렸다. 칼로 팔을 긋는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나의 사소한 버릇들이 자해의 종류에 해당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릴 때(초기 청소년 시기) 머리카락을 뱅글뱅글 돌려서 잡아 뜯는 버릇이 있었다. 내가 앉았던 자리는 금방 머리카락으로 수북해졌다. 그 머리카락들이 남아 있었으면 지금 머리숱이 더 많았을까. 또,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면 손톱을 다 물어뜯은 상태였다. 손톱 양옆을 깨끗이 정리한답시고 계속 잡아 뜯어서 종종 피가 났다. 피가 무섭다고 말하면서도 그런 피는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게 그냥 휴지로 꾹 누르고 있었다. 마지막 자해는 주로 여름에 벌어졌다. 모기에 물리면 다른 사람들보다 피부가 많이 붓는 편인데 계속 긁다 보면 가려움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세게 오랫동안 긁으면 모기에 물린 부분이 빳빳해지고 두꺼워지는 느낌이 들면서 피가 났는데 가려움보다는 쓰라림이 덜 괴로웠다. 세균 감염 같은 건 생각나지 않았다.
지난 학기에 대학원 과제로 심리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상담자 앞에서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말할 때보다 더 솔직하게 나에 대해 털어놨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비밀이 보장된다는 점, 그리고 그 상담자를 아마도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는 점이 편안했다. 그러기에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내 심리 분석 결과를 해석하는 상담자는 원인을 어린 시절에서 찾으려고 했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들을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는 내 모습을 스스로 알아차렸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점점 현재로 건너오는데 말하고 싶지 않고 말하기 어려운 주제 앞에서 자꾸만 머뭇거리게 됐다. 아무리 편안한 상담자 앞이라고 해도 꺼내기 싫은 주제였다. 상담자는 이런 내 모습을 보고 과거의 상처는 다 치유가 돼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데, 여전히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상처가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은 이제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하지만 표현하지 못한 상처는 더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청소년 시절에 자해를 심하게 했다는 아이가 나와서 어른들에게 부탁하던 말이 떠오른다. 좀 기다려 달란다. 아이가 스스로 도움을 요청하고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라는 게 보챈다고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기에 공감은 하면서도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기다려 주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
표현하지 못한 상처는 더 깊숙이 들어갈 것이다. 더 깊고 날카로운 상처가 되어 스스로를 괴롭힐 수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연고를 바르고 깊은 곳 어디선가 치유될 수도 있을 것이라 기대해본다. 그래도 가능하다면 더 깊숙이 들어가기 전에 꺼내 주고 싶다. 내 상처도, 아이들의 상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