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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아름다운', 우리 반려견은 천국에 있을까?

by 찬영

고양이 쏘냐가 미녀로 변신한 까닭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에는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바로 주인공 이해숙(김혜자 분)이 키우던 고양이 '쏘냐'가 천국에서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개도 마찬가지였다. 반려동물들이 모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어 주인을 맞이했다.


처음 이 장면을 봤을 때 '아, 이거 완전 판타지구나' 싶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니 궁금해졌다. 과연 동물들

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그리고 그들도 죽은 후에 어딘가로 가는 걸까?


동물이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모티프는 사실 새로운 게 아니다. 불교의 윤회 사상에서는 동물이 업보에 따라 사람으로 환생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환생'이 아니라 '천국'이라는 기독교적 배경을 깔고 있으니 좀 다른 얘기다. 제작진이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설정한 건 분명해 보인다.

천국보다 아름다운.jpg


솔로몬 왕이 남긴 수수께끼 같은 한 구절


그런데 놀랍게도 바이블에는 동물의 영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바로 구약 성경 전도서에서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지혜롭기로 유명한 솔로몬 왕이다.


여기서 '짐승의 혼'은 히브리어 원문으로 '네피쉬'인데, 이는 영어로 'spirit'에 해당한다. 한글 성경에는 대부분 '혼'이라고 변역되어 있다. 그냥 우리말로 '영혼'이라고 이해하는 게 쉬울 듯하다. 성경 원문이 기록된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비롯한 많은 언어들은 '영'과 '혼'을 합쳐서 부르는 표현이 없으니 말이다.


이는 바이블에서 같은 의미의 단어 표현을 어느 구절에선 'soul'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spirit'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영'과 '혼'은 함께 있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영혼'이 한 단어로 쓰이는 우리말이 조금은 뿌듯하게 느껴지는 지점인 듯싶다.


천국 vs 낙원, 헷갈리는 사후세계 지도


그런데 잠깐, 드라마에서 말하는 '천국'이 정말 바이블의 그 천국일까? 여기서 좀 정리가 필요하다.


신약 마태복음에 주로 등장하는 '천국'은 영어로 'Kingdom of heaven'이다. 이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죽으면 바로 가는 곳이 아니라 혼인 잔치가 있을 곳 등 앞으로 올 나라로 표현되어 있다.


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옆의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한 그 '낙원(paradise)'은 죽으면 바로 가는 곳이다. 시간표가 다르다는 얘기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의 배경은 엄밀히 말하면 '천국'보다는 '낙원'에 가깝다. 바이블은 먼훗날 언젠가(?) 몸의 부활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기에, 죽은 직후에 영혼이 머무는 임시 거처 같은 곳으로 보인다.


천국보다 아름다운 쏘냐2.jpg 이생의 쏘냐, 찬국에서 여자 사람으로 변한다.


반려동물은 무지개다리를 건널까?


요즘 반려동물을 잃은 사람들 사이에서 '무지개다리(Rainbow Bridge)'라는 말이 유행한다. 죽은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 건너편에서 주인을 기다린다는 위로의 이야기다. 정말 아름다운 상상이다.


하지만 앞서 인용한 전도서를 보면, 동물의 영혼은 사람과 달리 "땅으로 내려간다"고 되어 있다. 사람의 영혼이 "위로 올라가는" 것과는 반대 방향이다. 바이블의 논리대로라면 동물은 낙원에 가지 않는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바이블에는 마지막 때에 모든 사람이 부활한다는 기록이 있다. 영혼과 몸이 다시 합쳐져서 새하늘새땅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의 부활에 대한 언급은 찾기 어렵다. 물론 새하늘새땅에 동물이 아예 없다는 말도 없지만, 적어도 사람처럼 부활의 과정을 거치지는 않는 것 같다.


창조의 비밀, 그 결정적 차이


그렇다면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그 답은 창세기의 창조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신다.(마지막 7일에는 쉬신다) 다섯째 날에는 어류와 조류를, 여섯째 날에는 육상동물과 사람을 만드신다. 그런데 사람 창조만큼은 서술이 좀 다르다.


창세기 2장에서 아담(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 창조 과정을 자세히 보면, 먼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빚으시고, 그 다음에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되어 있다.


동물들에게는 이런 '생기를 불어넣는' 과정이 없다. 그냥 "땅이 생물을 내라" 하시니 생물이 나왔다고 간단히 기록돼 있다. 여기서 결정적 차이가 생긴 것 같다.


'우리의 형상'이라는 특별함


창세기 1장에는 또 흥미로운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우리'라는 복수 표현도 신학적으로 흥미롭지만, 더 주목할 것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점이다. 동물에게는 이런 설명이 없다.


구약 말라기서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구절이 있다. "여호와는 영이 더 있어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후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좀 복잡한 표현이지만, 요점은 하나님이 아담 한 사람에게 특별한 영을 불어넣어서 '그들', 즉 인류 전체를 만들려 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혈관세포들이 모여 혈관섬이 되고, 결국 한 사람의 몸이 완성되듯이 말이다.


반려동물과 함께 '천국보다 아름다운'


《천국보다 아름다운》이 보여준 동물들의 천국행은 아름다운 상상이지만, 바이블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반려 동물을 천국에서 만나든 못 만나든 한 가족으로 지낸 추억이 있으면, 그때만큼은 드라마 제목처럼 반려동물과의 '천국보다 아름다운' 시간과 공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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