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만 잘하면 된다.
"얼마나 남았어?? 시계 봐! 11시 20분이잖아! "
"이제 다 했어."
아이는 내 눈치를 보며 책가방에 학원숙제를 집어넣고 후다닥 양치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저녁시간은 밥 먹고 치우고 특별히 하는 게 없어도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11시 반, 12시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우리집은 10시 반을 취침시간으로 정하고 웬만하면 11시에는 잘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10시반을 시작으로 '이제 자야지~' 라고 해도 양치하고, 자기 전 근시예방 안약인 마이오가드도 눈에 넣어주고 불 끄고 누우면 이미 10시 45~50분.
침대에 누워서도 기본 10여분의 수다를 이어가는 딸 때문에 결국 진짜 취침은 11시 좀 넘어서 이루어진다. 잠도 많은 녀석이라 아침에 힘들지 않게 일어나려면 10시반이라는 시간은 최소한의 숙면을 위한 마지노선인 것이다.
그런데 일요일 밤, 이미 누워서 잠이 들었어야 될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이는 아직 숙제를 마무리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내 입에서는 참고 있던 '네버엔딩 잔소리' 버튼이 켜지고 말았다.
"에휴..또 이 시간이야! 낮에 놀 거 다~ 놀고 숙제도 별로 없는 것처럼 하더니 왜 저녁때부터 숙제를 하냐고..! 엄마가 이럴 줄 알고 낮에 "숙제해~" 했더니 "하려고 했거든!" 말대답이나 하고, 좀 있다 친구 약속 시간 맞춰 홀랑 나가버리고.. 그리고 실컷 놀고 왔으면 서둘러서 하는 게 있어야 되는데, 왜 이렇게 느긋했던 거야?? 엄마는 이해가 안돼서 그래.. 왜 그러는 거니?? 응?? "
캄캄하고 고요한 적막 속에 아무 대답이 없는 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길 없는 아이에게 향하던 내 잔소리도 방향을 잃고 한숨 소리와 함께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에효. 얼른 자........."
"엄마… 나.. 학교에서 장점하고 단점 각각 10개씩 월요일까지 써오라는 거 있었는데 단점을 아직 다 못 썼어. 내일 일찍 깨워줘"
"장점은? 다 썼어? "
"응, 10개 다 썼어. 근데 단점은 4개밖에 안 써서 10개 채워야 되는데 뭐 쓰지? 엄마가 얘기해 줘."
순간 내 머릿속에는 내가 생각하는 아이의 단점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직까지 시간 개념 없는 것, 숙제 있는데도 놀기부터 하는 것. 등등 바로 전에 잔소리를 쏘아붙였던 것들이다.
그렇지만 나의 본분은 바로 엄마!! 내가 생각한 단점들을 마치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아이에게 말해줄 수는 없었다.
본인이 단점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엄마인 내가 '넌 이게 부족하고 이게 좀 잘 안되고~ ' 라며 선수 쳐서 얘기해 줄 필요는 없으니까.
"글쎄... 뭐가 있을까? 오늘처럼 숙제 늦게 하는 거?"
생각 안 나는 듯 적당히 텀을 두다 눕기 전, 한바탕 잔소리한 내용에 대해 살포시 꺼내보았다.
"그건 이미 썼어. 그거까지 4개야. 6개 더 써야 되는데.."
"알겠어. 일찍 깨워줄 테니까 아침에 생각해 봐"
그렇게 우리는 잠이 들었고 다음 날 아침, 어제 밤 늦게 잔 탓에 겨우 눈을 뜬 딸이 부랴부랴 세수하고 옷을 입고 식탁에 앉더니 어제 밤에 말한 단점에 대해 다시 물어본다.
"엄마, 나 단점 뭐 쓰지?? "
본인 단점이 생각 안 난다며 나의 의견을 계속 물어보는 딸에게 색안경 낀 내 대답이 실망감을 줄 거 같아 핸드폰으로 '성격단점'을 검색해 보편적인 단점들에 대해 얘기해 줬다.
'걱정이 많다, 우유부단하다. 주위에 관심이 없다, 자주 긴장한다, 성격이 급하다. 협동성이 없다. 시야가 좁다. 귀찮음이 많다, 자신이 없다. 등등..‘
줄줄 불러줬는데 이 중에 해당된다고 느껴지는 게 한 개도 없단다.
'엥? 없다고? '
"아~ 그래?? 귀찮음이 많다. 는?"
자기는 아니란다.
엄마인 내가 생각하기엔 약간 귀찮음도 있는 편인거 같은데 본인은 아니라니..
단점으로 생각 안 한다는 사실이 약간은 어이없으면서도 너무도 당연히 아니라는 그 모습에
'그래,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단점은 아닌 거지.뭐~
와! 근데 내 딸이 이렇게 자존감이 높았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결국 나머지를 채우지 못하고 학교가서 ’친구들에게 물어봐야지‘ 하면서 책가방을 챙겨 나갔다.
평소 자존감 있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와 많이 대화하고 소통하려 노력해왔었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자꾸 '학'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를 바라보게 되니 예전에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말해줬던 것들이 이제 더이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제 같은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하는 것이다.
엄마의 비난섞인 잔소리에도 아이가 쉽게 풀이 죽거나 하지 않는 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아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본인에 대한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잔소리가 점점 늘어가는 엄마 옆에서 이런 마음을 유지해 주고 있는 사실이 고마웠다.
나와는 정반대 성향을 가진 아이의 학교생활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 나의 학창시절이 떠올라 비교해 보게 된다.
학창 시절, 대학 때, 취준생 때 등등 매 순간 내가 나에 대해 적어야 되는 기회가 있을 때 나의 고민은 항상 장점이 없는 거였다. 단점은 술술 말할 수 있는데 장점은 하나하나 말하기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가도 그 정도는 아니니 장점으로는 못 쓰겠는데… 하며 나 자신에게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었던 거 같다. 남의 시선에 대한 걱정도 한 몫 했었다.
내가 자라면서 느꼈던 부모님과의 소통의 부족함, 그로 인한 아쉬움이 소심한 학창 시절을 보내게 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런 나와 달리 적극적이고, 남의 시선보다는 자기안의 소리에 집중할 줄 아는 아이를 보며 가끔은 엄마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아이를 바라보게 되고 빛나는 시절을 보내고 있는 거 같아 부럽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건 어렵지만 그 안에서 좋은 걸 찾아보자면 아이를 통해 미처 몰랐던 나에 대해 하나씩 깨닫고 배운다는 것이다.
동시에 자아성찰도 가능하다.
'뭐 해줄지 생각하는게 아니라 나부터 부정적인 잔소리 하지 말아야겠구나. '
잘 크고 있는 아이를 응원하며 나에게 외쳐본다.
"너나 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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