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하는 글쓰기 리추얼 Day3
작품 :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607), Caravaggio
내 이름은 사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지요. 결국 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물을 때에 '사랑'만이 오롯하게 남는 것 같아 그렇게 지었지만(불려질때만이라도 그걸 잊지말자며), 사실 여전히도 사랑이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가는 데 스피커로 <가시나무 새> 노래가 울려퍼진 적이 있어요.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이 쉴 곳 없네....' 정확하게 가사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쌀쌀한 바람 사이로 거짓말처럼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리고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바라보았어요. 초등학교 때 국가가 흘러나올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며 어디에서든 멈춰서야 했던 그 느낌과는 많이 다른 이건 내적 동기가 드러나 멈춰서는 그런 경험이었지요. 그 한 곡이 학교 공간의 나무와 잔디와 아스팔트와 지나가는 사람들 위로 내려 앉고 스며드는 아침 풍경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제 안으로 그 노래가 스며드는 순간이었겠지요. 이 세상은 나를 비추는 공간이니까요.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요. 카라바조의 다윗과 골리앗의 그림을 보는데 그 음악이 떠오릅니다.
카라바조는 범죄자였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요. 지금 봐도 살아움직이는 것같은 이런 천재적인 그림을 그린 화가가 살인자라니 잘 와 닿지가 않습니다. 골리앗의 모습도 너무 무섭게 표현되었는데 본인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고 하고, 다윗의 표정은 자신의 청년 시절을 그려넣었다고 하네요. 요즘 범죄와 범죄자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는 프로그램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한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과연 인간으로서 범죄자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특히나 이 그림을 그린 카라바조처럼 살인이라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할 때에는 더더욱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다보면 지금의 모습이 조금 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안타까움이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까지는 참 어려운 과정들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건 신의 영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카라바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고 그가 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는지를 듣다보면 또 이 그림에서 드러나는 천재성에 대한 사랑만큼 한 인간도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요.
제 안에도 물론 죄값을 다 묻지 않았지만, 많은 실수와 상처를 내는 가시들이 산재해 있어요. 그랬기에 그렇게 가시나무 새 노래에 온 몸이 반응을 했겠지요. 그렇게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 대해 타인만큼도 모를 때도 있고, 타인 만큼 떨어져 지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처단하는 것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시를 뽑아내며 생채기를 만드는 것보다는 가시를 초콜렛처럼 녹일 수 있는 자비심을 선택해보고자 합니다. 업이 두터워 이번생에 안된다면 다음 생에는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먹고 오래걸리더라도 사랑의 길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자비심과 함께 내 안의 허물을 닦아나가면서 타인에게서 비춰지는 모든 허물은 자기 자신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스로가 맑아질수록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다워 보이니까요. 가시나무 새 노래에 걷는 것도 멈추고 눈물로 허물들이 쓸려 나오던 맑은 대학생의 얼굴의 나와 카라바조 청년때의 얼굴을 한 다윗의 모습을 겹쳐봅니다. 살아갈수록 쌓여가는 두터운 카르마를 향하는 모든 손가락을 다시 내면에 품고 끌어안는 밤입니다. 카라바조의 다윗과 골리앗 그림 덕분에 내 안의 가시들에게 다시금 자비심으로 다가갑니다.
오늘의 글은 카라바조의 마음을 대신할 이 노래로 마무리 하고 싶네요.
<가시나무 새>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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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y3_화해하는글쓰기 해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라는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어리고 약한 다윗에게 힘을 주어 작은 돌팔매로 거대한 적장 골리앗을 물리치게 했습니다. 성서의 내용대로라면 다윗은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고 승리에 환희하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다윗은 어쩐지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골리앗의 얼굴에는 슬픔과 회한이 어려있는 것 같아요.
작품을 그린 카라바조는 바로크 시대의 포문을 연 예술가입니다. '카라바조 이전에도 미술이 있었고 이후에도 미술이 있었지만, 까라바조로 인해 이 둘은 절대 같은 것이 될 수 없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가 미술사에 끼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의 뛰어난 실력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것은 그가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라는 점입니다. 39세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그는 크고 작은 온갖 범죄에 연루되며 감옥을 드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천재성을 아까워한 고위층 후원자들 덕에 몇 번이나 방면됩니다. 그러나 결국 서른 다섯 살이 되던 해, 그는 결국 살인이라는 중죄를 저지릅니다. 이후 몇 년간 그는 도피하며 살인죄를 사면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지막 시도로 교황의 사면을 받기 위한 작품을 싣고 로마로 가던 중, 다른 범죄자로 오해받아 체포되며 그림을 실은 배를 놓치고 맙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며칠을 걸으며 작품을 찾다 쇠약해진 그는 말라리아에 걸려 간이 진료소에서 숨을 거둡니다. 묘비도 없이 대충 묻힌 그의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현재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천재화가에게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죽음이자, 동시에 신의 벌을 받은 듯한 범죄자의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카라바조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서 카라바조는 잘린 골리앗의 머리에 자신의 당시 자화상을, 그리고 다윗의 얼굴에는 자신의 소년 시절의 얼굴을 그려넣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화가였지만 동시에 광기어린 범죄자였습니다. 범죄에 연루된 삶을 살면서도 그 세계에 맘 편히 머무르지 못했고, 교회의 사면을 통해 양지에 나오길 늘 간절히 바라는 이중성을 보였습니다. 어쩌면 작품에서처럼, 자신안에 다스려지지 않는 괴물의 목을 누구보다 쳐내 죽이고 싶었던 것은 카라바조 그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범죄자인 그를 이해해 줄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발견한 이중성의 아름다움이 그의 지독한 내면의 싸움의 결과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세상은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 이분되기 어려운 곳이고, 저 또한 스스로에게 모순을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