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습니까, 경계입니다.

류츠신, <삼체1> 북리뷰

by 루이

하늘에서 해와 달이 사라지고 개구리비가 내렸다. 임금의 덕성이 부족한 탓이다. 우물물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라에 재난이 닥칠 징조다. 어느 날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떴다. 곧 새로운 임금이 나타날 것이다....


무지와 야만의 세계로부터 인간을 깨운 것은 이성, 그리고 과학이라는 새로운 눈이었다. 그 눈은 어디 먼 데서 온 건 아니었다. 그저 주변의 것들을 내 눈으로 관찰하면 되었다. 찬찬히. 그리고 일어나는 현상에 ‘?’라는 표식을 달고 보면 인과 관계가 파악되었다. 혹 의심스러우면 여러 번 되풀이해서 보았다. 실험이라는 절차를 거치거나. 그리하여 과학은 우주만물에 대해 타당하고 그럴싸한 해석을 인간에게 선사했다. 땅의 끝은 둥글게 말려있으며 지구는 태양의 주변머리를 30km/s로 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지구와 태양 사이에 달이 끼면 하늘에서 해가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우주는 팽창하고 있으며 질량이 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를 당긴다. 때로는 빛조차 휘게 만드는 힘의 영역이 존재한다. 신화와 몽매 속에서 잔뜩 움츠렸던 사피엔스 족속은 똑똑해지면서 조금 더 당당해졌고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는 원자였다가, 쿼크였다가 이젠 끈의 진동이 되었다. 원자의 모형은 과학자마다 다르게 구성되었고, 빛은 입자였다가, 파동이었다가, 이젠 둘 다가 되었다. 인간은 인간을 꼭 빼닮은(아니 곧 넘어설 조짐을 보이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냈지만 정작 인간 자신의 시원(종말)에 대해서는 여전히 몽매하다. 이쯤 되면 과학의 진보와 함께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제대로 알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과학은 우주 저 편의 신의 세계를 끌어내렸지만 이를 대체할 명쾌한 그 어떤 세계를 제시하지 못했다. 광활한 우주를 메운 암흑 속에서 인간의 이성은 과연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삼체>는 경계에 선 과학자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저격수’와 ‘농장주’... 과학에 대한 과학자 스스로의 자조적 푸념 속에서 과학자들은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 좀 더 진화한, 고차원적 세계에 구원을 청해야 할까. 아니면 먼저 세상을 등진 이들의 뒤를 따라야 할까. 광기와 야만의 세계(문화대혁명)로부터 상처 입은 과학자, 예원제는 철저히 이성의 편에 서기로 한다. 생명의 은인조차 그녀의 이성 앞에선 무력하게 스러진다. 그리하여 구축된 ‘삼체’의 세계(VR)... 과학과 문명의 궁극으로 점철된, 극렬하는 태양 3개가 정립(鼎立)한 그곳에서 난세기와 항세기는 불규칙적으로 교차한다. 수천, 수만 번의 탈수와 회생을 통해 생명의 끈을 이어가는 동안 이들의 문명은 무한히 진화한다. 주 문왕과 진시황, 묵자, 갈릴레이, 아리스토텔레스, 코페르니쿠스, 뉴턴, 아인슈타인.... 희대의 석학들이 머리를 맞대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소설 중 가장 유머러스하고 진진했던 부분) 하지만 ‘삼체’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지구 삼체 반군(‘삼체’ 추종자들)은 복잡한 파벌과 분파로 갈라졌고, 심지어 일부는 유사 종교로 퇴색했다. 식민지 지구를 향해 양성자를 발사한 문명의 극한 오리지널 ‘삼체’의 세계에서도 회의(懷疑)의 목소리는 존재한다.


모든 것이 문명의 생존을 위해 존재합니다... 원수님 우리의 삶을 보십시오... 전체 문명의 생존을 위해 개인의 존엄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할 수 없으면 죽어야 합니다. 삼체 사회는 극단적인 억압 정치에 놓여 있습니다.... 제가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정신생활의 획일화와 메마름입니다.... 우리는 문학도, 예술도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향유하는 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사랑도 고백할 수 없습니다. 원수님, 이런 삶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회의론자 1379호 감청원의 발언이야말로 <삼체>의 저자 류츠신이 제기한 본질적 물음이 아니었을까. 그 잘난 문명의 궁극이 인간(구성원)의 삶에 의미를 줄 수 없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어떤 문명의 살충제로도 박멸할 수 없었던 벌레의 원시적 생명력이 시사하는 바는 사뭇 크다. ‘최상의 하드 SF’, 뭔 소린지 통 알겠는(?) 과학적 디테일 속에서도 가늘게 들려오는 울림이 있었다면 그건 바로 1379호 감청원의 낮은 목소리!!! <멋진 신세계>의 야만인 존과 무스타파 몬드의 설전이 떠오르는 지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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