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으로 읽는 역사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북리뷰
약 700만 년 전 지구상에 등장했다던 인류가 원인(猿人)의 위상을 거쳐 호모 속의 현생 인류로 진화하는 동안,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라시아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알래스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는 동안, 수렵과 채집의 고단한 생활 끝에 어쩌다 땅에서 돋아난 낟알들을 부리며 정착과 농경의 주체로 거듭나기까지... 역사 속 단 몇 줄의 요약에도 꽤나 장구한 세월이 소요되었다. 농업 혁명으로 발생한 잉여생산물들은 계층 분화와 중앙집권, 국가로 이어져 문명과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까지가 지금까지 선사시대와 고대사에 대한 이해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밟아 형성된 다양한 고대 국가들과 이들의 투쟁사를 읽는 것이 다음 수순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과정들을 통시적이 아닌 공시적 관점을 적용해 다시 들여다본다면? 특히 정착과 농경생활의 시기에 줌-인하되, 초점을 한 곳이 아닌 지구상의 여러 군데로 확대해 보기로 하자. 농업 혁명으로 진화한 인류사는 과연 각 대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을까. 유라시아의 밀과 보리가 같은 시기 남아메리카에서도 돋아나고 있었을까. 뉴기니에서 사탕수수로 열량을 충당하는 동안 아랫동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무엇으로 아침을 해결했을까.
유럽은 가능했는데 왜 뉴기니는 그러질 못했느냐는 얄리의 물음에 대한 제레드 다이아몬드 옹의 (사뭇 거대 서사인) 답변에는 이러한 공시적 관점이 필연적이다. 오늘날 불균등한 국제 정세의 근원을 보다 오래된 시간의 영역으로 끄집어 올려 탐색하되, 지리 환경적 요소를 반드시 염두에 둘 것, 생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저자의 이러한 참신한 접근은 역사 이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것은 물론, 그의 논증 과정을 통해 드러난 인류 문명의 역사적 아이러니들은 독자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분량이 방대한 까닭일까. 저자는 복잡한 논리 전개보다는 단순한 정공법으로써 주제를 부각한다. 서두(제1부)에 제시된 폴리네시아, 몰락한 잉카 문명의 사례를 통해 저자는 지리 환경적 요소가 인간 삶의 저변(먹거리 조달 양식)을 형성하고, 사회조직과 신분 분화, 문화 형성의 중요 원인이 되었음을 피력한다. 또한 가축화는 농경 생활에 기여하는 것은 물론 인간 사회에 전염병을 확산시켜 이것이 대륙 간 침략에도 유용하였음을 밝힌다. 1부는 <총, 균, 쇠>의 전체 주제이자 대전제로서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각 대륙의 지리 환경적 특징들과 문명사를 결부, 자신의 주장을 논증해 나간다.
저자에 따르면 작물화, 가축화는 애초에 지리 환경적으로 유리한 곳에서 비롯되었다. 그냥 눈떠 보니 금수저를 쥐고 있던 셈.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최초의 작물화는 비교적 비옥한 토양의 지역(서남아시아, 중국, 중앙아메리카,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 아마존강 유역, 미국 동부 등)에서 유리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독립적으로 식량생산을 한 곳은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은 식량 생산의 기술을 타지역에서 도입, 발전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과정은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꽤 다양했을 것이지만 저자는 그 전파에 있어서도 지리적 특성이 크게 작용했음을 짚어낸다. 같은 위도 상에 동서로 이어진 유라시아가 남북으로 길게 놓인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에 비해 그 전파가 수월했다는 것, 즉 대륙의 축에 따라 전파 속도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륙의 축이 역사의 축을 돌려놓았다는 발상도 흥미롭지만 전파 속도의 차이를 독립적 작물화의 숫자와 변종 여부로 논증해 낸 부분도 놀랍고 탁월했다. 작물화 과정에 진화론적 관점을 투입, 인간과 식물이 서로의 환경이 되어 진화를 촉발했다는 서술 역시 매우 흥미롭다. 가축화의 과정에서 벌어진 ‘균’들의 활약상은 매우 진진하면서도 <총, 균, 쇠>를 다른 역사서들과 구분 짓게 한다. ‘균’을 지배하려는 동안 인간의 지능은 계속 진화했고 ‘균’들은 더욱 교묘해졌지만 그 사이 인류의 역사는 판도가 나뉘었다. ‘균’들과의 동거에 성공한 자들이 역사를 쥐고 흔들게 된 것이다. (c.f. 인간과의 한판 승부에서 끝까지 도토리를 사수한 날쌘 다람쥐들과 결코 길들여지지 않은 가젤과 얼룩말들에게 갈채를)
농경 부족사회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로 가는 사이 그 비약의 결정적 특이점은 아마도 ‘인구 폭발’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물화, 가축화에 성공한 지역에서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경쟁이 치열한 사이 사피엔스의 지능은 한층 업그레이드되고 문명의 이기는 덩달아 승승장구했을 것이다. 이후 문명의 발달 여부에 따른 경쟁력의 차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바다. 다만 문명의 발달을 끌어온 계기, 그리고 전파와 확산에도 지리적 요소가 작용했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고. 저자는 자신이 전개해 온 이러한 논리를 4부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기니, 동아시아,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에 확대 적용해 증명한다. 물론 언어학적, 인류학적 방대한 자료들과 함께.
출간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명성을 유지해 온 만큼 <총, 균, 쇠>에 대한 다양한 비판적 시각역시 존재할 것이다. 유럽에 비해 동아시아의 역사가 다소 소홀히 다루어진 점, 그리고 저자의 논리가 적용되기 어려운 수많은 사례들, 특히 중국의 경우, 무엇보다도 인류 역사의 흥망사를 그저 지리 환경적 요인에 국한시켰다는 점... 궁극적 원인을 파고드는 저자의 추론과 논리에 감탄하는 한편, 너무나 다양한 시공간적 맥락을 두고 모든 과정을 단순화하기엔 무리가 없지 않다. 저자의 집필 의도가 서양(유럽)의 식민 지배가 민족성이나 지능, 우월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리, 자연이라는 우연적 환경 속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신박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이는 인간의 잘잘못보다 그저 타고난 환경적 우연 탓으로 얼버무리는 것 같기도 하다. 지리 환경적 요소는 인과 관계가 아닌 그저 연관 관계 정도로 파악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저자 역시 이런 우려를 간과하진 않았을 것이다. 얄리가 던진 질문 - 왜 유럽은 강력하고 뉴기니는 그렇지 않은가 -의 직접적 요인은 아무래도 ‘총, 균, 쇠’가 유력하기 때문이다. 다만 '총, 균, 쇠'가 두드러지게 된 그 역사적 배후에 대한 우연의 스펙트럼은 저자를 통해 보다 더 확장된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