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북리뷰

by 루이

TV드라마, 혹은 역사, 때로는 현실 정치 등을 볼 때면 늘 궁금해 하던 문제가 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악당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어떻게 저리도 오랫동안 건재할 수 있을까. 악당은 그렇다 쳐도 그를 따르는 무리가 늘 존재해 왔음에, 그들은 과연, 왜, 무엇 때문에 악당의 편에 서서 악당의 심복이 되어 악당의 명을 저리도 잘 따르는 것일까. 그들에겐 가치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머리’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래 어쩌면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음을 안다고 해도 그들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한, 즉 그들의 이익을 지속시켜 주는 한 그럴 수도 있겠지. 독재자를 따르는 무리들이 그의 위세를 업고 얼마나 많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하지만 ‘이야기’를 벗어난, 우리가 사는 현실은 실제로 선과 악이 그리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다. 게다가 그것이 우리의 밥줄과 연계되어 있다면 때로는 그 선과 악의 구분이라는 게 무용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진정한 야망을 품은 집사라면 끊임없이 자신의 주인을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리 업계의 한 분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은 주인의 동기를 엄밀하게 검토하고 그의 견해에 담긴 포괄적인 내용들을 분석해야 하며 오직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만 자신의 기능이 바람직한 목적에 사용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주인을 그처럼 비판적인 태도로 대하면서 훌륭하게 봉사한다는 자체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 나름의 ‘확고한 소신’을 형성하고자 끊임없이 애쓰는 집사의 경우, 훌륭한 전문가의 필수조건에 속하는 자질, 다시 말해 ‘충성심’ 면에서 부족해질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통상적으로 독자는 1인칭 화자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 속에서 이야기를 바라보게 된다. 그러므로 2대에 걸친 ‘집사’로서의 스티븐스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따라가다 보면, ‘독짓는 늙은이’나 ‘매잡이’의 장인과도 같은 경지에 그를 올려놓게 되고 ‘사적인 실존’을 물리치고 ‘전문가적 실존’을 공고히 해 온 그의 이성과 직업 철학에 갈채라도 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게다가 주인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가 아닌 ‘고귀함과 존경할 만한 덕목을 모두 갖추었다’고 생각한 주인에 대한 섬김이니 이 얼마나 고결하고 타당한가.


하지만 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고결한 신사, 달링턴이 실상 나치에 부역한 꼭두각시에 불과했음은 결국 스티븐스의 신념에 균열을 가져온다. 게다가 스티븐스의 믿음이 그리 객관적이지도, 타당하지도 않았음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스티븐스의 그동안의 충성은 과연 무가치한가. 그의 투철한 직업 철학은 무모하기만 한 것인가. 개인적인 그의 삶은, 집사로서 나치의 끄나풀을 위해 봉사한 행동은 어쩌면 큰 비난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치에 부역한 또 다른 인물 아이히만과 스티븐스는 또 얼마나 다른가.


미스 켄턴이나 루이스, 달링턴 대자와의 삐걱거리는 대화 속에서 화자 스티븐스는 각성의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당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주인이라는 작자는 결국 나치에 부역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한데 당신은 그 밑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주변의 지적질에도 불구하고 뚝심 있게 그의 복종심을 합리화시켜나가는 화자는 과연 비난을 면할 수 있는가. 시대가 바뀌고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달링턴 경을 모셨냐는 물음에 화자는 허둥대며 미국 신사 존 패러데이의 집사임을 주장하며 그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았던 신사, 달링턴 경을 배반하는 것을 보면서 독자는 스티븐스의 무모한 직업 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아무리 신사처럼 차려입고 차를 타고 교양 있는 언어를 써도 그의 신분은 이내 발각된다. 분별 있는 누군가에 의해서 말이다. 17세기 ‘풍’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근래에 제작된 아치 구조물이 웨이크필드 부인의 매의 눈에 발각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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