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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Jul 24. 2024

산티아고에서 천사가 되다.(下)

35일 차 : 아 라바꼬야에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까지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 35일 차 상편에 이어서...


신부님은 산티아고에 오면 꼭 먹어 보고 싶은 음식이 있다고 했다. 츄로스였다. 예상외의 순박한 메뉴에 순간 당황했지만 신부님이 사준다고 하여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신부님은 용인을 기반으로 성직자 활동 중이며 종교적 이유 때문에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무릎 통증이 심해 꽤나 고되었지만 참고 걸어올 만큼의 충분한 가치를 느꼈다며 완주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며칠 휴식을 취하면서 스페인의 다른 도시나 인근 유럽 국가들을 여행할 수 도 있을 텐데 당장 내일 아프리카로 간단다. 케냐에서의 자원봉사 일정이 잡혀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기다리고 있을 지역 주민들, 현지에서 합류하기로 한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역시 성직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와 나는 그동안 사용한 장비들이 조금씩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얇은 비닐 우비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났다. 아내의 스틱은 지면과 닿는 꼭지가 빠져버렸고 내 것은 애초에 짝이 맞지 않았다. 피스테라까지 아직 4일을 더 가야 하는지라 새것으로 바꾸기에는 애매했다. 우리 상황을 전해 들은 몇몇이 본인들의 장비를 주겠다고 했다. 자신들은 산티아고에서 순례가 끝났기에 다시 쓸 일이 없단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감사히 받아서 잘 쓰기로 했다.


신부님도 자신의 우비와 스틱을 아내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다. 다만 우비가 없으면 비를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기에 대안이 필요했다. 우산을 사기 위해 인근 상점으로 향했다. 아내가 우산을 함께 골라 주는 동안 나는 좁은 내부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와 신부님의 모습이 다정해 보였는지 계산대에 있던 상점 주인이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다.


"(아내와 신부님을 향해) 부부인가 봐요? 잘 어울리네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박장대소했고 당황한 신부님은 나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남편이라고 알려주었다. 실수를 깨달은 주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거듭 사과했다. 아내와 나는 전혀 미안할 것 없다며 안심시켜 주었다. 덕분에 재밌는 기억 하나가 생겨났다.


신부님의 다급한 손짓(왼쪽)과 다정한 두 남녀의 모습(오른쪽)




신부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한식파티 멤버들과 함께 순례자 사무실로 향했다. 보관해 놓은 짐을 찾고 순례길 완주 인증서도 발급받은 후 곧장 미리 예약해 둔 공유 숙소(에어 비앤비)로 이동해 짐을 풀었다.


인원은 Leon 한식파티 멤버에서 인O님과 조님이 추가되어 총 7명이었다. 팀을 나누어 한쪽은 장을 봐와서 요리를 하고 다른 쪽은 빨랫감들을 모아 코인 세탁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내가 속한 요리팀은 모두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손발이 척척 맞았다. 부탁하지 않아도 저마다 할 일을 찾아 나선 덕에 음식 준비가 수월했다. 정신없이 재료 손질을 마치고 요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다행히 빨래를 담당한 팀이 숙소에 복귀하는 시점에 맞추어 상이 차려졌다.


1차로 돼지고기 수육, 해물파전 그리고 감자전을 먹었다. 신선한 돼지고기는 푹 삶아져 제법 두껍게 썰어냈음에도 부드럽게 씹혔다. 양파, 마늘, 대파 등으로 우려낸 채수가 잡내를 잡아 주어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오징어가 들어간 해물파전은 간이 적당하여 간장 없이도 막걸리와 환상적인 궁합을 뽐내었다. 순식간에 접시가 비워졌고 이어서 냄비 가득 끓인 수제비로 2차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반죽이 잘 숙성되어 쫄깃한 식감이 느껴졌고 국물도 제법 구수했다. 힘들고 긴 여정을 동행하며 정서적 유대관계가 끈끈하게 형성된 사람들과 함께 먹어서인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 순례길을 걸으며 맞이한 특별한 순간들에 대해 저마다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다들 같은 경험을 했기에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간혹 동일한 현상도 저마다의 독특한 시선으로 색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에 신선한 자극도 가미되었다. 아내와 나는 낮에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룩셈부르크 출신의 폴을 만나 눈물을 쏟은 장면을 언급했다. 말하는 도중 둘 다 다시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잠시 호흡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얘기를 마치자 보O님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언제인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데 대략 2주 전이었을 거예요.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은 룩셈부르크 출신 순례자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는 핸드폰에서 사진을 보여주며 이 둘을 아느냐고 물어봤어요. 순례길에서 천사 같은 한국인 부부를 만났는데 같은 국적이라 혹시 알까 싶었대요. 그때는 사진 속 부부가 누군지 몰라 흘려버렸는데 방금 문득 다시 생각이 났어요. (아내와 나를 가리키며) 바로 두 분이세요."


보O님의 회상을 들은 아내와 나는 재차 감정이 벅차오르며 눈물을 흘렸다. 마음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이번에는 시O님이 거들었다.


"저랑 친하게 지낸 독일 출신 소피 아시죠? 얼마 전에 같이 걷다가 소피가 만난 순례객들 중 좋은 인상을 준 사람들이 몇 있다며 알려 주었는데 그중 두 분이 최고라고 했어요."


사실 소피와 일정이 겹쳐 자주 마주치긴 했으나 식사를 함께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소피는 사교적이라기보다 내성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하고만 종종 어울렸고 대부분 홀로 시간 보내는 것을 선호하는 듯했다. 우리와의 접점도 거의 없는 이에게서 극찬을 받았다. 아내와 나는 감격스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했다. 동시에 안도감이 들었다. 순례자 중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고 매사 부정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주변을 힘들게 하는 이들이 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기피 인물일 수 있다는 소심한 걱정을 늘 지니고 있었다. 우려와 반대되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여러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어 다행이었다. 아내는 기뻐하며 말했다.


"여보, 그래도 우리가 바르게 지냈나 봐. 감사하게도 우리를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네."


누구나 좋은 사람인척 연기할 수는 있다. 다만 매일 7~8시간을 걸으며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나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가리는데 쏟을 에너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체력이 좋으면 하루 이틀은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 달 동안이나 본성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힘들 때 그 사람의 진면목이 드러난다는 것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일 것이다. 매일같이 육체적 정신적 체력이 바닥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우리 부부는 과분한 칭찬을 듣게 되었다. 불현듯 혼자 왔더라도 같은 평가를 받았을까 고민해 보았다. 이 모든 것이 선한 심성을 가진 아내 덕분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후광 효과로 인해 한참 부족한 나까지 좋게 봐준 것이라 생각한다. 아내의 손을 잡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러게. 다 자기 덕분이야.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식사를 마치고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었다. 숙소 위치가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멀지 않았다. 산책 삼아 성당 앞을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모두들 흔쾌히 수락해 주어 어둠이 짙게 깔린 거리를 지나 성당으로 향했다. 늦은 저녁이었기에 발소리를 신경 쓰며 조용히 걸었다. 낮에 비가 오는 바람에 성당 앞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다행히 비는 그쳐 있었다. 밤이라 성당이 잘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와는 다르게 밝은 조명이 성당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사람이 없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음껏 포즈를 취하며 기념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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