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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uisLee Jul 31. 2024

마지막을 향해 한 걸음 더

38일 차 : 네그레이라에서 라고-아베레이로아스까지

2023.11.17 금요

산티아고 순례길 38일 차


Negreira 네그레이라 ~ Lago-Abeleiroas 라고-아베레이로아스

27.94km / 8시간 15분 / 맑음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침대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얀색 매트리스 커버 위로 무언가 툭하고 떨어져 자세히 보니 빈대였다. 혹여 옷가지 사이로 숨어버릴까 싶어 재빨리 처치했다. 아직 가려운 부위나 상처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내 피를 빨아먹어서 통통해진 것은 아닌 듯하다. 간밤에 뜯겼어도 하루 이틀의 잠복기를 거친 후에 증세가 나타난다. 사실 물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컸다.


불안함을 안고 길을 나섰다. 숙소를 나오자마자 이어진 산길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해가 조금씩 떠오르자 파란 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걸으며 마주한 모든 장면들이 새로웠지만 아무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분명 같은 길을 걸었음에도 풍경이 낯선 이유 대해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다. 다시 이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행복하다.




중간중간 여러 마을들을 지났지만 영업 중인 바르가 거의 없었다. 두 시간 반 만에 찾은 바르는 가파른 계단을 타야 했다. 다음 마을까지 가도 음식점이 있다는 보장이 없고 마침 휴식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단을 내리고 계단을 올랐다. 우리의 도착에 맞춰 막 떠나는 다른 순례자에 의하면 이곳 음식이 기가 막히단다.


기대감을 갖고 가게 내부로 들어가 테이블에 앉았다. 인기척에 주방에서 나온 주인 할머니의 인상이 선했다. 오렌지 껍질이 들어간 파운드 케잌, 인 그리고 커피를 주문했다. 포크로 케잌을 조각내어 입에 넣자 상큼한 과일 향이 퍼졌다. 식감은 꾸덕하면서 동시에 부드러웠다. 왜 가게 입구에서 마주친 순례객이 주인의 손맛을 극찬했는지 단 번에 이해되었다. 내부 인테리어를 포함해 잔잔한 배경 음악과 음식까지 모든 것들이 방문자에게 편안함을 선사해 주는 곳이었다. 지쳐있던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힘차게 다시 걸었다.





순례자용 어플에 따르면 오늘 약 32km를 가야 한다고 나왔다. 그럴 경우 내일의 코스는 23km 밖에 되질 않아 경로를 다소 단축시키기로 했다. 예정보다 빨리 일정을 마쳤음에도 8시간 넘게 걸은 탓에 제법 고되었다.


특히 마지막 한 시간가량 경사가 한 고개를 넘을 때 체력 소모가 심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길에서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중간 지점부터 허벅지 근육에 피로가 누적되어 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힘겹게 오른 정상에서 잠시 풍경을 감상하며 숨을 돌렸다.



아내와 나는 상승 구간보다 하강 구간을 싫어한다. 무릎 통증을 유발하기도 하고 발을 잘못 디디면 크게 다칠 수 있다 보니 매 걸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자연스레 평지에 비해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 소모가 심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길게 쭉 뻗은 내리막길은 온통 자갈밭이었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뒤로 걸어 내려오는 방법을 알려주니 곧잘 실행하고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내려오니까 엄청 편한데? 완전 신세계야."


덩달아 나도 기뻤다. 진작 생각해내지 못한 게 후회되었다.




17시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문이 잠겨 있고 대신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읽어 보니 주인이 18시에 온단다. 그전에 먼저 숙소에 들어가 쉬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비밀번호가 적혀있었다. 숙소는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쾌적했다. 2층 침실에는 이미 다른 순례객 몇 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샤워 등 개인 정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쉬고 있는데 주인이 왔다. 체크인을 하면서 저녁 식사에 대해 문의했다. 마을에는 바르나 식료품점이 없기 때문에 숙소에 달린 식당을 이용해야 했다. 시계를 확인 한 주인이 20시부터 식사가 가능하다고 알려주었다. 점심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에 잔뜩 굶주려 있었는데 2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실망스러운 소식을 듣고 2층 계단을 향하려는 찰나 주인이 불러 세웠다.


서툰 영어로 식사를 몇 시에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아 배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I'm starving. It'll be better if we can eat as soon as possible. (배가 너무 고파요. 최대한 빨리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주인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스페인어로 배고프다는 표현은 모른다. 대신 빨리라는 단어는 안다.


"Rapido. (빨리요)"


주인에게 내 의중이 어렴풋하게나마 전달된 듯하다. 무언가 실마리가 풀리는 느낌을 받은 순간 또 한 단어가 떠올랐다.


"Ahora. (지금요)"


표정이 밝아진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둘러 식당으로 우릴 안내했다.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며 따라갔다. 사실 두 시간 뒤에 식사가 가능하다던 입장이 왜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혹여 민폐나 실례를 범한 것일까 곰곰이 돌이켜 보았다. 굶주리고 지친 순례객들을 위한 배려라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서 주방장에게 맛있었다는 인사를 하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보답이었다.



오늘도 힘든 하루를 보냈다. 체력이 점점 빠르게 고갈되는 것이 느껴진다. 잠이라도 최대한 많이 자기 위해 일찍 침대에 들었다. 아내는 나보다 더 힘들 텐데 잘 이겨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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