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준비로 분주하던 원중의 전화가 울렸다. 마지막 체크가 끝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팀원들을 보며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긴 원중은 마치 저를 부르듯 떠있는 은아의 이름을 보며 웃었다.
ㅡ 어!
ㅡ 보고싶어, 안고싶고.
왜인지 축쳐진 목소리는 금세 원중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지금 제가 없는 곳에서 외로워 하고 있을 은아의 모습이 그려져 미안함이 몰려 온 원중은 다른 말 대신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ㅡ 나 오늘 너무 힘들었어. 처음으로 내 직업이 미웠고, 내가 미웠고, 네가 미웠어.
ㅡ ... .
ㅡ 나도 네가 돌보는 환자들처럼, 네 관심이 필요하고, 애정이 필요하고 그래.
ㅡ ... .
ㅡ 나도 네가 필요해.
ㅡ 어디야.
어디냐고 묻는 제 말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은아가 눈 앞에 그려졌고, 원중의 마음은 계속해서 조여왔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평소와는 다른 행동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은아가 걱정되면서 이윽고 눈 앞으로 그녀의 모습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어디냐고 묻긴 왜 묻냐고, 대답한다고 지금 당장 달려 올 것도 아니면서 왜 괜한 기대만 주냐고 소리치던 은아의 목소리가 전화를 끊은 지금에도 귓가에 사무치게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저를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들 또한 사무치게 들어왔다.
방송을 앞둔 은아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홈쇼핑 엠디로 살아온지 어느덧 오년이 훌쩍 흘러 있었다. 말로는 완판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막상 방송에 들어가고 제 눈 위로 on-air 라고 적힌 글자들을 보면 마음이 요란스레 요동쳐 오곤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밤낮이 없었던 제 안목이 틀리지 않길 바라며, 제 감이 어긋나질 않길 바라며.
" 역시 팀장님-! "
완판과 동시에 저를 향해 달려오는 팀원들을 보던 은아의 얼굴 위로 그제서야 웃음이 번졌다. 마음 졸이며 준비했던 두 달의 시간이 서서히 먼지처럼 흩어져가며 제게 웃음을 전해주었다.
" 너희 덕분이야, 고생했어 그동안. "
" 저희보단 팀장님이 더 수고하셨죠, 감기 투혼 고생하셨습니다! "
" 덕분에 휴가 쓰겠다, 잘 쉬다 올게. "
" 고작 이틀인데요 뭐. 편히 쉬다 오세요. "
평소 팀내에서 애살많기로 유명한 유한의 말에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은아는 곧장 제게로 달려오는 지운을 보며 그대로 멈춰섰다.
" 너 그러다 넘어진다. "
" 선배! 오늘부터 정말 휴가예요? "
" 누가 들으면 나 한달 쉬는 줄 알겠다. 고작 이틀 쉬거든? "
" 그래두요, 저한테는 그 이틀도 얼마나 긴데요. "
" 이참에 너 나한테서 좀 멀어지는 걸 배워. "
울상인 지운의 이마를 밀며 현장을 벗어나던 은아는 곧장 국장실로 올라갔다. 수고했다는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은아는 제 앞으로 놓여지는 봉투를 보며 송 국장과 시선을 맞췄다.
" 애들이 너 엄청 걱정하더라, 이러다 곧 부서지겠다고. "
"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뭐. "
" 그렇게 노래 부르던 전신 마사지 받으라고 주는거야. "
" 들었어요? "
" 뭘? "
" 나 사직서 난다는 얘기? "
" 야. "
" 잘 쉬고 올게요, 금요일에 봬요. "
" 니 입으로 말했다, 금요일에 보자고? "
" 갈게요. "
송 국장에게 건네받은 마사지 이용권을 들고서 팀실로 돌아 온 은아는 여전히 저를보며 울상인 지운을 옆으로 잘 쉬다 오라는 팀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가방과 자켓을 챙겼다. 마음같아선 감은 눈을 뜨면 집이길 바라는 마음이 컸지만 그럴리는 만무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곤함이 온 몸을 에워싸인걸 느끼며 은아는 얼른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집 앞에 다다라서야 냉장고에 먹을 게 있는지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내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 한권만 들면 배달집 전화번호가 수두룩한데.
넣으래서 넣었는데 왜 넘치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하지 못한 음식 냄새들이 코 끝을 맴돌았고, 안으로 들어서자 제가 온 줄도 모르고 음식과 고군분투하고 있는 원중이 보였다.
" 아니, 블로그에서 하란대로 했는데 얘는 왜 거품을 물고 넘쳐. "
" 여기서 뭐해? "
" 어. 어?! "
" 뭐하냐니까. "
" 뭐하긴, 너 먹이려고 삼계탕 만드는 중이지. 잘 다녀왔어? "
" 갑자기 왜 이래. "
날이 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원중은 말없이 은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직 화났구나? 여전히 뾰루퉁한 은아가 귀엽다는 듯 옅게 웃던 원중은 앉아있으라며 턱짓으로 뒤 쪽 의자를 가르켰다.
얘가 거품물고 넘치는 이유가 이래서잖아. 원중의 옆으로 다가서며 가스렌지의 불을 줄이던 은아는 그제야 의자에 앉으며 자켓을 벗었다.
" 병원 일은 어쩌고 온 거야. "
" 병원 일은 어쩌고 온 거야. "
" ... . "
" 잘 하고 왔어, 가서 손이나 씻고 와. "
" 그 날 그렇게, "
" 말하지 마, 니 입에서 나오는 그 날만 들으면 미안해서 죽을 거 같다. 그냥 차라리 나 한대 때릴래? "
" 뭐? "
" 차라리 나 한대 때리라고, 시원하고 강하게. 어때? "
" 어때는 무슨. 숟가락이나 줘, 배고파. "
" 있어봐, 발라줄게. "
그러며 작은 접시와 숟가락을 은아에게 건네곤 삼계탕이 담긴 보울 그릇을 제 앞으로 가져 온 원중은 하고 싶은 말만큼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느끼며 말없이 살을 발라 은아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 나 오늘 내일 쉬어. "
" 어? 왜? "
" 이번 프로젝트 준비하면서 너무 힘들었어. 국장님도 그걸 아시고 이틀이지만 쉬라고 하시더라. "
" 국장님도 아는 걸 남자친구가 몰랐네. "
" ... . "
" 너 조금 더 삐져있어도 되겠다. "
제 숟가락 위에 잘게 바른 살을 올려주며 미안하단 듯 웃는 원중을 보며 은아는 그간 제게 몰려왔던 서운함이 한순간에 사라짐을 느꼈다. 저만큼이나 그도 본인의 일에 많이 지쳐있을테고, 힘들었을텐데 너무 제 감정만 드러낸게 아닌가 싶어 울컥 울컥 미안함이 몰려왔다.
힘들지 요즘? 은근하게 제게 물어오는 은아의 목소리에 원중은 살을 바르다 말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췄다. 아무 말 않는 그녀의 입이 제게 다시 묻는 듯 했고, 아무 말 없이 저를 보고있는 그녀의 눈이 저를 위로하는 듯 했다.
" 자기가 더 힘들지. "
" 그 날따라 내가 예민했어, 미안해. "
" 나도 잘한 건 없는데 뭐. "
" 그렇다고 잘못한것도 없는데 뭐. "
" 기분 괜찮아? "
" 괜찮아. 그냥 자기가 너무 보고싶었나봐, 이렇게 얼굴 보니까 그 때 들었던 그 마음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없네. "
오롯이 제가 보고싶어 그랬다는 은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원중은 저도 그랬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아마도 미안함과 고마움이 밀려와 그를 더 조용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 뭐할거야, 이틀동안? "
" 그러게? 뭐하지 이틀동안? "
" 일단 잠 좀 푹 자고. "
" 응. "
" 응? "
" 말해 봐, 자기 의견이 좋으면 내 하루에 반영할게. "
" 푹 자고나면 하루는 이미 가 있을테고, 그러면 하루가 남는 셈인데. "
" ... . "
" 그 하루는 나한테 주는게 어때. "
" 근무는 어쩌고? "
" 승현이한테 당직 빚내야지. "
" 살다보니 빚이 다 반가울 때도 있네. "
다 바른 살점을 은아의 그릇에 놓아주며 자리에서 일어 선 원중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냈다. 평소 날카로운 것에 잘 베이는 은아를 배려해 컬린스잔에 맥주를 따라 건네곤 제가 마실 캔을 따기가 무섭게 단숨에 반을 비워냈다.
" 그래서 취하겠어? "
" 나 오늘 취해야 돼? "
" 취하지 마. "
" 꼭 취하라는 말로 들린다? 뭐 옆자리 내어줄거면 취하고. "
열린 제 방을 가르키며 얘기하는 원중을 보며 은아는 미움없는 곁눈질을 해보였다. 평소 술을 즐겨마시진 않았지만 왜인지 오늘은 쓰기만 하던 술이 달게 느껴졌고, 그런 저를 보며 놀라하는 원중을 보며 은아는 평소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 그 날 내가 그랬잖아. 내 일이 밉고, 내가 밉고, 네가 밉다고 했던 거. "
" 응. "
" 같이 일했던 팀원 중 한명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우리 회사에서 준비중이던 프로젝트를 가지고 갔더라고. "
" 그래서? "
" 이미 엎질러진 일이고 내가 너무 믿었던 탓이지. 생각해보니까 걔는 이미 여길 벗어날거라는 티를 내도 너무 냈었는데 내가 무지했던거야, 프로젝트에 정신이 팔려서. "
" 그게 또 왜 당신 탓이야. "
"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게 겁도 나면서, 이 일은 조심성이 다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내가 미워지고, 그렇게 점점 내가 약해지는걸 느끼니까 당신이 필요했던거야. 안되는 걸 알면서 당장에 내 옆에 당신이 있어야 된다고 고집을 부리면서. "
평소라면 더디게 들었을 은아의 진심이 술기운에 번져 허공에 띄어졌다. 한없이 약해진 얼굴이, 한없이 가라앉은 목소리가 몇번이고 원중의 마음을 뒤엉키게 만들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못 들을 말 이였고, 못 들을 진심이였다. 맥주 캔 두개에 그간 쌓여있던 제 마음을 하나씩 꺼내는 은아를 보며 원중은 다른 말 대신 테이블에 놓여진 손을 맞잡았다.
" 올해는 당신한테 기대기보다 기댈 수 있는 여자친구가 되겠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차라리 말이라도 말걸. "
" 그러게? 그렇게 말하는 당신이 나는 너무 무서웠는데, 차라리 잘됐네. "
" 왜? "
" 그렇게 말한 날 이후로 나한테 한번도 안 기댔던 거 알아? "
" 그랬나? "
" 그랬어. 그래서 내가 얼마나 서운했는데, 얼마나. "
" ... . "
" 차라리 잘됐어. 나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여자친구도 좋은데, 나 믿고 기대는 여자친구가 더 좋아. 그러니까 혼자 끙끙 거리지말고 나 찾아, 그 날 처럼. "
은아의 이마를 살짝 밀며 웃던 원중의 얼굴 위로 그제야 편안한 웃음이 감돌았다. 어느 덧 열한시를 가르키는 시계를 보며 가야겠다. 라고 말하던 원중을 보며 은아는 고개를 저었다.
" 자고 가. "
" 진짜? "
" 응. 아침에 당신 좋아하는 된장찌개 끓여줄게. "
그럼 오늘 취해도 되겠네. 남아있던 맥주를 단숨에 들이 켜 비워 낸 원중의 얼굴 위로 장난 가득한 웃음이 번져갔다.
연애를 하기전과 다르게 연애가 무르익은 지금엔 많이도 변해버린 상황을 두고, 그는 예전처럼 그녀의 하루를 궁금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제가 밉다 말하고, 그래놓고도 내가 미안해 라고 말하는 그녀를 보며 그는 번져가는 마음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내일 아침, 제게 된장찌개를 끓여준다며 재료를 미리 손질해야겠단 말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은 그는 벅차오르는 행복을 막지 못해 흘리고야 말았다. 막을 수 없는 행복을 묻힌 채 고맙다고 얘길하니 그녀가 웃는다. 행복이 행복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