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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한울 Jun 18. 2019

퇴사 후 유럽 - 스페인 세고비아에서

2018.04.20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세고비아로 향했다. 호텔에서 구시가지까지 걷는 동안 조금씩 각도를 달리하여 펼쳐지는 풍경에 황홀했고 주변의 고요함이 주는 평화에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톨레도에서 좀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예약된 버스 시간이 다가올수록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스페인에서 3일째, 처음 마드리드에 도착했을 때 이방인이 된 듯한 외로움과 두려움은 어느새 잊혔다. 몇 번 다녀봤다고 익숙해진 길과 대중교통 이용은 여행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스페인 세고비아는 여행 계획을 하기 전, 내게 스페인 여행을 다짐하게 했던 TV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를 통해 알게 된 지역이다. 로마 수도교, 세고비아 대성당, 알카사르 등 주요 관광지를 여행하는 할배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꼭 내 두 눈을 통해 저 풍경을 담고 싶었다. 그렇게 큰 기대를 품고 도착한 세고비아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톨레도와는 또 다른 스페인의 과거 모습이 간직되어 있었고, 도시 곳곳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눈이 돌아갈 만큼 황홀했다. 세고비아에 도착한 시간이 늦은 오후였지만 스페인의 하루는 길었기에 여유롭게 도시 곳곳을 걸어 다닐 시간은 충분했다. 다음날 원활한 여행을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동선을 확인했고, 간단하게 저녁을 먹을 식당과 마켓 위치를 파악하며 새로운 여행지에 적응할 시간을 가졌다.


오랜 시간 돌아다니다 보니, 저녁이 될수록 쌀쌀해진 바람에 겉옷이 필요해졌다. 스페인에서 관광을 할 때는 체온조절이 쉽지 않다. 여행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비가 오지 않고, 맑은 하늘에 눈부신 햇살이 항상 반겨주는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 너무 덥다. 그러다 해가 지는 늦은 오후가 되면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다. 그래서 항상 겉옷을 준비하지만 더운 날씨에는 입지도 않을 옷을 들고 다니는 게 불편한 일이었다. 귀찮아서 땀이 나도 겉옷을 입고 다니다 보니 스멀스멀 옷에서 냄새가 나는 듯했다. 아.. 큰일이다.


한국에서도 방송을 탈 만큼 유명한 관광지여서 세고비아에도 관광객들이 많았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사람들 속에서 익숙한 얼굴과 언어가 들렸다. 스페인 여행을 하며 처음 보게 되는 한국인 관광객. 반가운 마음보다 그들을 보니 왠지 나 자신이 초라해 보였다. 비단 한국인 관광객뿐만 아니라, 이 곳에 여행을 온 사람들 모두가 깔끔하게 잘 차려입은 것처럼 보여서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듯한 내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평소에 옷을 '잘 입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옷이란 그저 더울 땐 시원하게, 추울 땐 따뜻하게만 해 주면 된다는 기능성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목적을 두고 구입한 옷이 없었다. 더군다나 긴 여행 동안 무겁고 부피가 큰 짐을 들고 다니는 게 싫어서 배낭에 들어갈 만큼의 옷만 챙겨 와서 매일의 옷차림이 최선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 와서 스스로의 모습에 초라함을 느낀다니 참 아이러니했다. 젊고 예쁜 애들이 곱게 화장하고 세련된 옷차림과 액세서리를 하고 옆을 스쳐갈 때, 뭔지 모르겠지만 내 여성성이 상처 받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도 느끼지 못했는데 여행을 와보니, 누군가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고비아에서 묵게 된 호스텔은 혼숙이었다. 규모가 작고 가정집을 개조한 듯한 호스텔이었는데 숙박비가 저렴하고 로마 수도교 광장에서 멀지 않아서 여행객들로 가득 찼다. 방 안에는 이층 침대가 2개 놓여 있었는데, 1층은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낮아서 2층으로 올라가 짐을 풀었다. 저녁 시간이 되니, 한 방에 묵게 될 외국인들이 한 명 한 명 들어왔는데 이때부터 난 길고도 긴 침묵을 하게 된다. 사교성이 뛰어난 남자 외국인이 말을 걸어주었지만(그리고 잘생겼었다..) 마음과는 달리 부족한 영어 실력에 간단한 대답밖에 하지 못하니 참 답답했다. 호스텔은 세계 여러 나라 여행객들이 숙박을 하며 친목을 쌓는 기회가 되는 곳이기도 한다지만, 모두가 떠나고 나만 방에 혼자 남아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지만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나는 영어 공부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사람을 사귀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위해 여행을 하는 편이니까.


그렇다 보니, 모두가 새로운 '친구'를 찾으러 나서는 저녁시간에(어쩌면 여행에서 가장 즐겁고 화려한 시간에) 나는 어두운 방 안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글을 쓰고 있다. 한국에서도 쉽지 않았는데, 환경이 바뀌었다고 내 성향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은 아닌가 보다. 이 또한 여행을 통해 알게 된 내 모습이겠거니 하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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