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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한울 Jun 21. 2019

퇴사 후 유럽 - 스페인 세비야에서

2018.04.25

어제 야간 버스를 타고 리스본에서 세비야로 오는 일정이어서 일기를 쓰지 못했다. 세비야로 출발하는 버스 정류장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메일을 사전에 확인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충분한 여유를 두고 터미널에 도착했다. 직원들에게 몇 번이나 확인을 했지만 다들 명쾌하게 위치를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한참을 헤맨 끝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를 발견해서 다행히 제시간에 차를 탈 수 있었다.


출발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버스에는 나를 제외한 탑승자가 없었다. 제대로 탄 게 맞을까 하는 불안감이 스치듯 지나갔지만 몰려오는 피로감에 걱정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그렇게 버스는 출발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가 다시 멈춰 서더니 다른 여행자를 태웠다. 여행자는 연신 고맙다는 뜻의 포르투갈어로 인사하고 곧이어 한국말로 정말 다행이다며 일행과 대화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처럼 버스 정류장을 못 찾는 이가 또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제대로 버스를 탔다는 안도감이 그제야 들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혼자 여행하면서 예약한 교통편을 놓쳤거나(혹은 반대 방향으로 탔다거나) 숙소 예약을 잘 못해서 일정이 엉키거나 하는 등 우여곡절이 없었다. 낯선 나라에서 말 한마디, 글자 하나 못 읽는 것 치고는 운이 잘 따라 주는 것 같다. 가끔 여행하면서 이런 운이 따라주는 것을 느낄 때마다 평소에 좀 더 착하게 살아야지,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야지 하는 생각을 한다. 인생에서 행운이란 결국 '총량의 법칙'이라서 지금 당장 보상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선물처럼 다가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그 모든 선물 같은 순간이 혼자 여행할 때 찾아왔던 것 같다.


야간 버스에서 몸을 뒤척이며 잠이 들었다가 깼다를 반복하다 보니 세비야에 도착했다. 터미널에서 첫차가 운행될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숙소로 바로 가는 게 안전할 것 같아서 걸어가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그 새벽에 여자 혼자 길을 걷는 게 더 위험했던 것 같은데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숙소에 도착했다.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비로소 안도감이 들며 따뜻한 물로 씻고 쉬고 싶었다. 그러나 공용 샤워실이 없어 오후 체크인 시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직원의 대답에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딱히 방법이 없어 짐만 맡겨놓고 로비에 마련된 소파에 피곤한 몸을 의지하며 시간이 빨리 흘러가기를 기다렸다. 

곧 동이 트고, 시내에 하나 둘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기를 찾아가는 세비야를 마주하니 피곤하고 우울한 기분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렸다. 하루를 꼬박 버스에서 지내며 몸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로비에 멍하니 앉아있는 것보다 세비야 시내를 구경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숙소 밖으로 나왔다.


세비야 시내를 관광하면서 사람들이 왜 이 곳에 그렇게 많이 오는지,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관광지가 왜 '세비야'인지 알 것 같았다. 혼자 여행을 해도 별 거 없다. 가이드만 없을 뿐이지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가이드 투어 일정 그대로 다니며 즐거워한다. 그러고 보면 내 취향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다만 다수의 사람들 속에서 우리의 취향이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기 싫어서 혼자 여행을 하는 것뿐이다.

저렴하고 괜찮아 보이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기다리며 검색 포털을 통해 글을 읽었는데 '자기 사람을 알아보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중 '타인의 결점도 개성이다'라는 말이 눈길을 끌었다. 스스로에게도 '결점'이 '개성'이 된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오히려 하나의 '결점' 때문에 좋은 점까지 없애버릴 정도였는데, 타인의 결점을 '개성'으로 생각하라니.. 그동안 관계했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며 내 눈에만 보이는 결점들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울타리 밖으로 밀어냈는가를 생각했다.

스스로에게 '완벽'을 추구하며 결점 없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애써왔기 때문인지, 타인에게도 나와 똑같은 완벽함을 추구하다 실망한다. 사실 '완벽'이라는 것이 어디 있겠으며, 불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지 오래지만 쉽게 포기되지 않는다. 혼자 여행을 하며 문득문득 찾아오는 외로움, 좋은 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나 '결점'을 찾아내어 지금 이 상태에 안주해 버린다. 우연히 접한 하나의 글이 지금 내 모습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것 같아 조금 씁쓸함이 느껴졌다.


스페인 마드리드에 도착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일주일이 흘렀다. 한국에서 하루하루가 지치고 힘들었는데, 이 곳에서는 매일매일이 즐겁고 행복해서 시간이 멈춘 듯하다. 그러다가도 이 행복 또한 기한이 있음을 깨닫고 또 끊임없이 슬퍼지기도 한다. 영원히 붙잡아 두고 내 맘대로 멈출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욕망 앞에 나약해지는 것이 인간이기에.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잠시만 시간을 멈춰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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