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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한울 Jun 24. 2019

퇴사 후 유럽 - 스페인 그라나다에서(1)

2018.04.27

기차여행의 시작. 스페인에 와서 처음으로 기차를 탔다. 기차로 이동하는 바깥 풍경이 버스로 이동할 때와는 다르게 느껴져 무척이나 멋있다. 오늘은 푹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이했고, 화창해진 날씨에 론다를 떠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마음은 상쾌했다. 아무튼 날씨가 좋으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 여행이 아직 4월에 머물러 있는 것도 정말 좋다. 5월, 한 달 동안 더 여행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고 즐거운 감정을 숨길 수 없다.


어제저녁을 과하게 먹어서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기차를 탔더니 배가 고프다. 빵만 커다랗고 내용물은 없는 샌드위치를 먹었더니 허기가 진다. 배낭 하나 매고 혼자 여행을 다니다 보니 먹을 것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이것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미세먼지, 황사 등으로 파란 하늘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 곳은 매일이 청명하고 맑은 하늘이다.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니 공기도 깨끗한 느낌이다. 차창 밖 풍경을 감상하며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기차역에 내렸는데, 생각보다 번화가는 아니어서 숙소가 있는 시내까지 찾아갈 일이 막막했다. 여행책에 있는 지도로는 한계가 있어서 구글맵을 켜서 찾아보기로 했는데 내 위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구글맵은 그냥 평면 지도를 보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는 한산한 거리에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위기에서 초능력이 발생한다고 했던가. 갑자기 지도 보는 눈이 트이며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숙소를 찾아냈다. 


첫날은 새로운 지역에 적응도 하고, 다음날 관광 일정도 계획하자는 의미에서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다. 처음 기차역에 내렸을 때 당황했던 것보다 길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걷다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관광지 면적이 거대했다. 그리고 세비야나 론다에 비해 '도시'적인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기 때문에 사람도 많고 소란스럽고 정신이 없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론다에서 여유를 느끼고 재충전 한 에너지가 재빠르게 소비되는 느낌이었다.

그라나다에 온 이유는 딱 두 가지다. '알람브라 궁전'과 '플라멩코 공연'. 세비야에서는 아쉽게 공연 티켓을 구하지 못했는데 그라나다에 독특한 플라멩코 공연장이 있다고 해서 찾아 나섰다. 한참을 구글 지도와 싸우며 헤맨 끝에 공연장을 찾았고 바로 표를 예매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가슴 찌릿한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면서 인간의 삶은 곧 '예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시들의 삶의 고통을 승화한 춤이 플라멩코라고 들었는데 댄서들의 표정과 몸짓, 기타 선율에서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단순히 즐기면서 볼 공연이라기보다는 '슬픔'이 느껴지면서 전율이 오는 기분이었다. 공연을 보다가 눈물이 날 뻔한 것을 꾹 참았다. 말로 표현하기보다 훅 몰아치는 감정이 공연의 감상평을 대신해 준 듯했다.


감정이 채 사그라지지 않은 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여기저기서 버스킹 공연하는 것을 감상했다. 이 곳에 오니 어디나 예술가들이 있다. 직업으로 삼고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거리의 수많은 연주가, 가수, 화가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른 감정이 일어났다. 이 곳에서는 예술이 곧 생활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실력에 관계없이) 자신의 예술적인 면모를 보여주길 원하고 도시는 그런 장소를 아낌없이 '제공'해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생 한국과 아시아만 여행했던 나에게 유럽 도시가 꽤 낭만적이고,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그림 같은 문화유산이 배경이어서 거리의 예술가들이 다르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예술을 하는 것은 특별한 재능이 있거나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된다는 편견이 학습된 나에게는 누구나 자유롭게 예술을 즐기는 이 곳의 분위기가 신선했다. 


플라멩코 공연에 이어 거리의 악사들의 영향 때문인지 갑자기 나도 음악을 연주해 보고 싶어 졌다. 항상 뭔가를 직접 연주해 보고 싶은 열망은 있었는데 경제적인 이유로 포기하고, 직장생활에 치어 포기하고,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포기해 왔었는데 이 곳에 오니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팍팍하고 지루한 삶을 사는데 '음악'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이 곳에 오니 분명히 있다고 느껴졌다. 잘하지 못한다 해도,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이니까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꼭 도전해 봐야겠다.


플라멩코를 추는 댄서들의 절제된 움직임에서 느껴졌던 열정과 환희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오늘은 꽤 오랫동안 감상에 젖어 잠에 들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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