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읽은 지금, 맘껏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또 밸런타인데이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출처 요상한 이 날에 초콜릿업계의 대목, 마케팅의 홍수 속에
우리는 마치 초콜릿을 먹어야 되는 사람처럼,
줘야 되는 사람처럼 휘둘리고 있다.
상술이라며 혀를 차다가도
연애할 땐 왠지 비싸고 좋은 초콜릿을 주고받지 못함이 패배자인 것 같고
연애를 안 할 땐 아예 주고받을 사람 없다는 사실에 괜스레 쓸쓸해지곤 한다.
정신 차리자.
밸런타인데이가 어떻게 유래되었는지 무슨 의미인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짜 중요한 건 본질에 있다.
결국 사랑 위에 있는 관계에 있는 많고 많은 로맨틱한 날 중 하나일 뿐
정작 중요한 건 사랑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이 사랑이 그렇게나 어려운 이유는 '형태 없음'에 있다
우리가 담기는 그릇마다 형태가 달라지는 물의 형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운 것처럼
우리가 담아내는 사랑이 다르다.
실수는 여기서 발생된다.
먼저 우리는 사랑을 정의한다.
마치 사랑을 아는 것처럼, 사랑이 정의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에서 책에서 심지어 누군가의 짤막한 글 속에 있는 다양한 사랑의 표현을
마치 전부인양 말이다.
정의: 어떤 말이나 사물의 뜻을 명백히 밝혀 규정함
단언컨대 내가 정의하는 사랑. 그리고 타인이 정의하는 사랑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각 사람의 그릇은 모양도 깊이도 다르기에.
그러니 나의 사랑의 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사랑을 정의하지 않는 가장 빠른 길 일 수도 있겠다.
그 다음 실수는 사랑을 비교하는 데 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어떠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사랑을 정의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표면적으로 사랑을 비교한다.
가령 보이는 선물이 마치 마음인양 그 가치를 따지거나
그 사람의 살아온 삶 (가정에서의 상황, 상처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누군가와 비교하는 것이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눈에 보이는 것, 들리는 것 , 만져지는 것이 뇌에 전달되는 걸 어쩔 까 싶지만
사랑은 인간에 감각 안에 제한될 수 없다 초월적이다
실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불가항력이다.
그러나 실수가 발생했을 때의 우리의 태도는 우리의 선택에게 달렸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한낱 인간일 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라는 그릇이 사랑을 담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우리의 그릇이 속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 안에 우리를 던지는 것이다.
사랑의 눈빛으로
사랑의 입술로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손길로
사랑에 젖은 우리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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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남이섬에 놀러 갔을 때였다.
영화를 보러 가잔 나의 제안에 그가 답했다
'우리 영화 보지 말고 영화 찍읍시다.'
아. 얼마나 로맨틱한 대답인가.
그 후로 우린 좀비만 안 나왔지 로코에서 호러까지 여러 장르를 섭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