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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Aug 06. 2021

안데르센은 왜 소녀를 죽였을까?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성냥팔이 소녀>

  "엄마, 이거 내 책인데 엄마가 왜 봐? 엄마도 동화책 봐?"

  "응, '성냥팔이 소녀'를 읽은 후 생각을 적는 숙제가 있거든. 얼른 보고 갖다 놓을게. 둥아, 엄마랑 같이 책 읽을래? 엄마가 읽어줄게!"

  "아니, 시시해! 난 유튜브나 볼래"

 함께 책을 읽자는 엄마의 바람을 가볍게 뒤로 한 채 돌아서는 아들!

추운 겨울, 차가운 눈밭에서 하늘에 있는 엄마와 할머니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연기처럼 하늘로 사라진 소녀! 두 명의 어린이가 제 머릿속에서 잠시 오버랩됩니다. 

 

 이번 공모전 준비를 위해 '성냥팔이 소녀'를 다시 읽었습니다. 가벼운 '읽음'이 아닌, 의미 있는 문구들을 정성스럽게 필사하고 타들어가는 성냥 한 개비의 의미와 소녀의 생각, 소녀가 죽은 후 마을 사람들의 생각을 한참 동안 생각해 봤습니다. 그렇게 정독을 하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분명히 동화책 내용은 그대로였습니다. 하지만 순수했던 어린 시절에 들었던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말고 도와주자!'라는 교훈이 더 이상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어른의 찌든 마음과 저만의 특유한 삐뚤어진 마음으로 다시 본 '성냥팔이 소녀'는 매우 무섭고 외로웠으며, 슬픈 내용이었습니다.

 

 동화책 '성냥팔이 소녀'를 제가 느낀, 네 가지 관점으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첫 번째, '외로움'입니다.

 아마도 소녀의 감정은 단순한 외로움보다 조금 더 짙은 '고독함'일 것입니다.

 사람이 느끼는 '고통'과 '외로움'은 절대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똑같은 상황과 같은 강도의 노동을 하여도 함께 이겨낼 누군가가 있느냐에 따라 그 시간은 전혀 다르게 기억됩니다.

 만남의 기회가 제한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시간일지라도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됩니다. 생각만 해도 웃음을 띄우는 '아련한 추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혼자 오롯이 버터야 된다면 그 시간은 단지 '괴로운 고통'의 시간일 뿐입니다.

 그리고 고통스러운 일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하고 있다면 그저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고통스러운 일을 당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입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고 편안한 것 같은데 나만 힘든 것 같다면 어떨까요? 유독 더 힘이 듭니다. 소외로 인한 외로움에 비례하여 고통의 강도는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혼자 아파하고 분노하다가 도저히 상황이 낳아질 것 같지 않으면 모든 것을 놓아버리기도 합니다.


 고통과 외로움은 이렇듯 주변의 상황에 따라 뒤늦게 깨닫게 되는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는 혼자였습니다. 촛불이 꺼지는 찰나의 환상 외 현실에서의 소녀는 철저하게 혼자였습니다. 소녀의 가족이라고는 성냥을 많이 못 팔고 돌아가면, 혼을 내는  '아버지' 뿐이었습니다. 따뜻하게 소녀를 품어줄 어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성냥팔이 소녀가 죽은 날짜를 기억하시나요? 바로 12월 31일입니다! 12월 31일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지나간 시간을 추억하고 새해의 소망을 바라는, 따뜻하고 희망찬 하루입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부모님과 함께 있는 어린아이는 소녀를 더 외롭게 했습니다. 따뜻한 칠면조 구이는 소녀를 더 배고프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가장 포근한 날에 소녀는 차디차게 죽었습니다.

이제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집 창문으로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아이에게 주는 모습이 보인다.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내게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셨을 텐데...'

  추위와 배고픔, 외로움에 떨었던 작은 소녀 곁에 다시 사람들이 모인 건 그녀가 죽은 후였습니다.

  "미안하구나! 내가 성냥을 사 주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라고 후회하는 아주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어젯밤 소녀의 부탁을 외면했던 것을 매우 가슴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소녀를 교회를 옮기고 명복을 빌어줬습니다.

 새해의 희망찬 햇살은 소녀의 주검만 비출 뿐이었습니다.


 두 번째, '절망'입니다.

성냥팔이 소녀에게는 밝게 타오르다가 이내 꺼져버리는 성냥이 희망이고 절망이었다.

 소녀의 희망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 성냥 '따뜻한 난로', 두 번째 성냥은 '칠면조 구이와 케이크', 세 번째는 '수많은 양초들이 켜져 있는 크리스마스트리', 그리고 마지막 성냥은 '할머니'였습니다. 성냥에는 '따뜻함'과 '포근함'이 담겨있었습니다. 하지만 몸을 녹이기도 전에, 음식을 잡아보기도 전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밝은 성냥의 불빛은 허망한 연기로 변해버렸습니다. 성냥이 꺼질 때마다 소녀는 얼마나 절망하였을까요?

소녀는 할머니에게 꼭 매달렸습니다. 그때 성냥불이 막 꺼지려고 했어요.
그러자 할머니의 모습도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소녀는 얼른 성냥 다발을 꺼냈어요.
  '이것을 모두 켜면 할머니가 떠나지 않을 거야!'
  "할머니, 사랑하는 할머니 이젠 제 곁을 떠나지 않으실 거죠? 외톨이가 되는 건 정말 싫어요!"

 소녀의 마지막 희망은 그리운 가족이었습니다. 할머니와 헤어지기 싫어하는 간절한 아이의 마음은 애처롭다는 단어마저 뻘쭘하게 만듭니다.

 

 문득 헛된 희망을 품었다가 절망하는 성냥팔이 소녀가 이 시대의 '청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N포 세대(수많은 것을 포기함), 일본의 프리터족(정규직을 포기한 아르바이트 생계족), 중국의 탕핑족(서 있기를 포기하고 아예 누워버림)은 모두 포기하며 살 수밖에 없는 암담한 청년들의 현실을 나타내는 신조어입니다. 코로나 장기화로 인한 경제 악화, 부동산 가격 폭등, 산업구조조정 등으로 청년층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냥팔이 소녀처럼 열심히 살 뿐입니다. 아빠에게 매 맞을 게 두려워 노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소녀처럼 청년들은 미래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밤을 지새워가며 공부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야근을 합니다. 하지만 청년들은 소녀처럼 항상 춥고 배고프고 외롭습니다. 가난과 불행이 소녀의 잘못이 아니지만 생전에 그 삶을 벗어날 수 없었던 소녀처럼 청년들도 현실을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소녀를 따뜻하게 품어줘야 될 아버지는 소녀에게 두려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의지할 곳 없이 차가운 현실로 내몰리는 청년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절망한 소녀가 선택한 것은 '포기'입니다. 추위에 혼자 남기 싫어 남은 성냥을 모두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로 올라갔습니다. 청년들도 남아있는 열정을 모두 불태우고 있습니다. 열정이 모두 타버리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세 번째, '죽음'입니다.

 저도 '죽음'을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중학교 때 처음 생각했던 '죽음으로의 도피'는 제가 엄마가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저를 쫓아다녔습니다. 힘든 현실을 뿌리칠 용기도 없었고, 버티고 나갈 힘도 없었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이런 저를 죽지 않고 살게 한 것은 희망도 용기도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막게 해 준 것은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지옥으로 떨어지면 어떡하지? 내 남은 생을 고통받으며 다 채워야 된다던데... 아, 맞다! 죽으면 못 먹고, 헐벗은 채로 버터야 된다고도 하던데... 다음 생에 지금보다 더 나쁘게 태어나려나?'

제가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은 이런 나약한 생각들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자살'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엄마가 됐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죽음이 부모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지 알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못난 저를 세상 최고의 보물로 생각하며 40년 동안 소중하게 보살펴주신 부모님께 고통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부모님보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리는 최고의 불효를 하고 싶진 않습니다. 아직은 어린 제 아들놈도 청소년이 되고 성인이 되면 세상의 쓴 맛을 알게 되겠지요. 제 아들이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숨이 멎을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간절함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느껴진 중년의 나이에 '성냥팔이 소녀'를 보았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인데요?"
  "천국은 날씨가 따뜻해서 언제나 꽃이 피어있고, 맛있는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곳이란다. 게다가 엄마가 천국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단다. 이제부터 다 함께 즐겁게 살자꾸나... 앞으로 두 번 다시 슬픈 일은 없을 거야."
소녀의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했습니다. (중략) 이튿날 새해 아침이 밝았습니다.
소녀는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았고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소녀를 불쌍하게만 생각한 마을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소녀는 죽은 후에야, 비로소 행복해졌습니다. 천국에서 어머니와 할머니를 만난 소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습니다. 동화 속에서는 죽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줬습니다. 엄마에 대한 그리움, 배고픔, 외로움, 슬픔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제가 엄마가 된 후 다시 <성냥팔이 소녀>를 읽었을 때, 무섭고 위험하다고 느낀 부분이 바로 이 구절이었습니다. 안데르센 동화를 읽을 정도면 10세 미만의 아이들이니 죽음을 고민할 나이는 아니고, 청소년들은 동화책을 읽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성냥팔이 소녀'의 결말은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녀가 적극적으로 자살시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사후세계가 너무 아름답게만 그려져 있으니까요. 힘든 아이들이 동화책처럼 '죽음'이 많은 부분을 해결해주고 행복을 줄 것이라고 오해할까 봐 걱정이 됩니다.

 어린 시절의 역경을 딛고 훌륭한 어른으로 자라거나, 왕자님을 만나 신분이 상승되는 공주님, 하물며 오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백조'였다는 어마어마한 반전을 제시한 동화책이 많은데, 안데르센은 왜 유독 '성녕 팔이 소녀'를 죽음으로 마무리했는지 궁금합니다. 추운 겨울 성냥을 팔 정신력이면 뭐든지 했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작가는 성냥팔이 소녀를 죽여야만 했을까요? 아마도 이웃을 외면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주의, 충고를 주기 위한 경종으로 '소녀의 죽음'을 선택한 건 아닐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주제입니다.


 네 번째, '희망'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희망은 장밋빛의 밝은 미래가 아닙니다. 어린 소녀의 처절한 외로움과 죽음을 교훈 삼아 그저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작은 움직입니다.

죽은 성냥팔이 소녀처럼 불쌍한 아이가 그 마을에 다시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아이가 아무리 불쌍해도 아이를 집으로 데려가 돌보는 건 어려울 겁니다. 단지 푼돈으로 성냥 몇 개비를 사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푼돈이 아이를 하루 더 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 아이가 죽지 않을 만큼, 본인들의 죄책감을 면할 만큼의 행동을 실천하는 것이 제가 의미하는 '희망'입니다.


 '신데렐라'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은 호박을 마차로, 누더기 옷을 화려한 드레스로 바꿔줍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희망'은 이처럼 모든 것을 한 번에 확 바꿀 수 있는 요정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도움의 손길을 고민하지 않고 내밀어 줄 수 있는 온정입니다. 하지만 따뜻한 온정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마법이 아닙니다. 아주 작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억됩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쌓인 온정은 사람이 슬픔을 이겨 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힘과 용기를 낸 사람들이 많아지면 성냥을 사는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소녀의 가난과 슬픔을 다독여 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냥팔이 소녀'의 서두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건너편에서 빠르게 오는 마차를 피하던 소녀는 눈밭에 넘어진 채, 엄마가 남겨준 신발 중 잃어버린 한 짝을 찾고 있었다. 잃어버린 한 짝을 손에 들고 장난치듯 도망치는 소년을 바라보며, 소녀는 차디찬 눈길을 맨발로 걸어갔다.

 아마도 제가 말씀드린 작은 '희망'이 차곡차곡 쌓인 사회였다면 앞에 소녀를 보고도 빠르게 돌진하는 마차도, 소녀의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손에 든 채 장난치는 소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는 처음부터 새로운 이야기로 시작되지 않았을까요? 소녀가 잃어버린 신발을 가져다가 소녀의 작은 발에 신겨주는 '따뜻한 이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됐을 수도 있습니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부분이 변했습니다. 대면에서 비대면으로, 친밀함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로, 유망직종 종사자는 실업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변화의 흐름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이들은 역동적 흐름에 힘입어 부를 축척하고 성공을 하겠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인지하지도 못한 체 서서히 그 변화의 흐름에 억지로 휩쓸려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계층은 물결의 흐름을 놓쳐 정지된 것 같아 보이지만 서서히 가라앉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냥팔이 소녀처럼 연기로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들이 죽은 소녀를 보고 뒤늦은 후회를 하는 마을 주민이 되지 않도록 따뜻한 온기를 나눠줘야 할 때입니다.

 하나의 성냥은 작고 연약하지만 성냥성냥이 모이면 등대처럼 든든한 희망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도 혹은 우리의 아이들도 그 소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나에게 누군가 내밀어 주길 바라는 따뜻한 손을 우리가 먼저 내밀어 보면 어떨까요? 아마 이런 마음이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 어린 소녀를 죽이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작은 희망' 이 아닐지 조심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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