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교육 공무원'보다 '선생님'으로 불릴 수밖에 없을 만큼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교육에 대한 사명감을 갖고 계신 분들께 매우 감사드린다. 교권이 추락하는 요즘, 학생 앞에서 상식 밖의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선생님께도 존경을 표한다.
하지만, 내게 학교는 힘든 공간이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들도 '사회생활' 혹은 '단체활동'이란 명목으로 참아야 되는 곳!
비록 몇십 년 전의 교육 현장이지만 뜬금없이 교실 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동그라미 밖으로 나온 아이들을 때리던 사이코 같은 교사의 말도 군소리 없이 들어야 됐던 곳!
억울한 시간들의 연속이었으며, 그 시간을 버티고 앉아 있어야 되는 괴로운 물리적 공간이었다.
특히, 남들과 다른 나를 놀리고 조롱하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야 되는 방법을 터득해야 되는 비굴한 곳이었다.
장애인인 나에게 장애인 친구는 없다.
몸이 아픈 아이들이 없다는 것은 정말로 감사할 일이지만 그만큼 나의 어린 시절은 외로웠다. 내가 학생이었던 1990년대는 지금과 같은 끔찍한 학교 폭력이 없었다. 내가 당했던 유일한 물리적 폭력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딱 한 번이었다. 엄마가 사주신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하루 종일 기분 좋았던 당시의 나를 같은 반 남학생은 친구들이 다 보는 운동장에서 발로 찼다. 차기도 하고 발로 찍기도 해 원피스에 그 남학생의 운동화 발자국이 참 많이도 찍혔었다. 그 아이가 나를 때린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그냥 내가 재수 없다고 했다. 아마, 내가 지금 학교를 다녔다면 담뱃불로 어디 한 군데 지져졌을 것 같아 끔찍하다.
감사하게도(?) 물리적인 학교 폭력은 한 번뿐이었지만 매년 3월의 난 외로웠다. 신기하고 이상한 듯 나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버티는 게 힘들었다.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서러웠다. 3월의 난, 집에만 오면 울었다. 더 끔찍한 일은 그 일을 매년 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몇 달을 어렵게 버텨 주변 친구들과 조금 친해지려고 하면, 학년이 바뀌고 어김없이 3월은 또 왔다.
'제발 학교에 안 다니면 안 되겠냐고...' 엄마한테 빌고 빌었지만, 엄마는 들어주지 않았다. 확실히 엄마는 나보다 더 강했다.
"친구랑 놀고 싶고, 놀림받기 싫으면 공부해! 1등 하면 아무도 너를 무시 못 해! 억울하면 1등 해!"
엄마의 그 말은 마법과 같았다. 엄마 말은 완벽하게 맞았다.
90년대는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이 반장, 부반장 등 학급 임원을 했었다. 새 학년이 된 후 열흘 정도 지나면 담임 선생님께서 학급 임원 예비명단을 불러주셨는데 그 명단에 내가 있게 된 후부터 친구들이 말을 걸어주기 시작했다. 내가 몸이 아프니 당연히 바보일 거라고 무시했던 친구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서진이는 공부를 잘하니까 운동은 못해도 돼!'라며, 나의 장단점을 알아서 해석하고 방어해주는 친구들도 생겼다.
하지만 장애인인 내가 공부 잘하는 것을 더 못마땅하게 보는 친구들도 있었다. 한 달 정도의 짧은 시기 었지만, '왕따'라는 것도 당해 봤다. 딸에게 매몰찼던 엄마는 딸의 괴롭힌 친구에게 오히려 따뜻했다. 엄마는 나를 왕따 시킨 아이를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차려줬다. 딸을 괴롭힌 아이가 내가 손수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상황. 그 모습을 보며 엄마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참았을까? 자기 새끼에서 조금만 해가 돼도 물어뜯는 게 어미의 마음인데... '왜 그랬냐고!' 원망하고 싶었을 테고, '서진이와 친하게 지내 달라'며 애원도 하고 싶었을 텐데 엄마의 말은 그저 '다음에 또 놀러 오렴...'이었다.
어린 딸의 울부짖는 마음에 대한 조금의 위로도, 공감도 없이 차갑고 냉정하기만 했던, 엄마의 말!
'억울하면 1등 해!'는 날 일으키는 원동력이 됐다.
엄마의 그 말 때문에 대학교 입학, 취직, 결혼, 출산 등 인생의 과제를 하나씩 잘 풀고 있는 지금도 편하게 쉬는 것이 낯설어 스스로 너무 다그쳐 지치기도 하지만 그 말이 없었다면 나는 과연 지금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그로부터 30년 후, 내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이 됐다.
내 아들이 그때의 나라면, 내가 그때의 엄마라면... '놀림받고 오는 아들을 과연 예전의 엄마처럼 단호하게 대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 물어본다. 나는 그때의 엄마처럼 도무지 할 수 없을 것 같다. 상처 받은 아들을 내 품에 꼭 안은 채 밖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