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미운 아기오리>
여러분은 혹시 <저 여자는 쓸모없다>라는 동화책을 읽어 보셨나요? <모래 언덕의 이야기>, <얼음 아가씨>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셨나요? 그러면 우리에게 조금 더 익숙한 <엄지공주>의 주인공이 백설공주와 엘사처럼 왕실 혈통 즉, 진짜 공주님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계셨나요?
그럼, 이제 다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미운 아기오리>는 읽어 보셨나요? 네, 맞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보통의 오리와 다르다(못 생겼다)는 이유로 구박만 받던 못생긴 오리! 그런데 그 오리가 알고 보니 아름답고 우아한 백조였다는 그 내용입니다. 이처럼 <미운 아기오리>는 안데르센 160여 편의 동화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야기입니다. 동화의 대가 안데르센이 적은 동화책 중 줄거리조차 가물가물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왜 유독 <미운 아기오리>는 많이 읽히고 기억에 오래 남을까요? '기억'이란 단어가 무색할 만큼 이야기의 주제가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일까요?
바로 책을 읽는 순간, '미운 아기오리'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게끔 만드는 작가의 치밀한 구성력과 필력 덕분입니다. '알고 보니 재벌가의 숨겨진 딸!', '출세지향적인 나쁜 애인에게 헌신짝처럼 버려져 외국으로 도피했지만 3년 뒤 어마어마하게 성공하여 입국한 그녀!' 이처럼 역대급 반전을 품은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은 대리 만족을 느낍니다. '너희들! 나중에 후회할걸? 내가 알고 보면 어마어마한 사람이라고!', '지금 이런 고통쯤은 괜찮아! 나는 곧 너희들이 올려다볼 수 없을 만큼 멋진 사람으로 변신할 거라고!', '그래... 조금만 더 버티자! 봄이 되면 백조로 변신한다고!'처럼 마음속으로 반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통쾌해집니다.
안데르센은 독자들이 동화를 읽는 순간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의 초라한 내 모습도 괜찮다고 위로해줍니다. 모두 '미운 아기오리'를 자기 자신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웃음 띄게 해 줍니다. 드라마도, 소설도 아닌 예쁜 말과 그림뿐인 동화책인데 그 어려운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안데르센은 어떻게 독자들을 마법 같은 세계로 끌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바로 안데르센 자신이 '미운 아기오리'였기 때문입니다. 잠시 <미운 아기오리>의 탄생 배경을 알아보겠습니다.
안데르센은 1805년 덴마크의 어느 가난한 구두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틈틈이 시를 써 자신의 재능을 선보인 안데르센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어느 해 여름, 안데르센은 귀족의 집에 초대되었습니다.
“가난해서 공부를 못할 뻔하기도 했던 내가 귀족의 만찬에 초대되다니.”
안데르센은 즐거운 마음으로 귀족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다가 안데르센은 연못에서 헤엄치고 있는 백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얼마 전까지의 나는 무척 초라했는데, 이런 날도 있구나.’
안데르센은 가난과 그로 인해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고생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연못에서 못생긴 아기 백조를 보았습니다.
'지금은 볼품없지만 곧 어미처럼 멋진 백조가 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쓰게 된 작품이 바로〈미운 아기오리>입니다.
맞습니다! 바로, <미운 아기오리>는 안데르센이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보낸 아름답지만 강력한 경고였습니다. 꽥꽥! 오리 중 가장 못생긴 놈(사실은 '백조')은 작가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동화책에는 무시, 비난, 조롱, 구박을 어릴 때부터 이유 없이 들어야 했던 미운 아기오리의 마음이 매우 자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못생긴 오리 새끼잖아! 꽥꽥!"
오리들은 미운 아기오리를 부리로 쪼며 놀려댔어요.
'왜 모두들 나를 싫어하는 걸까?'
"너는 너무 못생겼어. 그래서 우리까지 창피하단 말이야. 어디로든 멀리 가 버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모두들 나를 싫어하는 걸까?"
미운 아기오리는 왜 다른 오리들이 자신을 싫어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태어났고, 살아갈 뿐인데 자신의 존재 자체가 괴롭힘과 놀림, 환멸의 대상이 된다는 데 미운 아기오리는 힘들어합니다.
마흔이 다 된 저는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모두들 나를 싫어하는 걸까?'라는 미운 아기오리의 독백을 읽던 중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천성 장애인으로 태어난 제 마음과 똑같은 미운 오리의 마음에 눈물을 흘린 것은 아닙니다. 단지, 안데르센이 글을 정말 잘 적었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가슴 아픈 생각을 한 주체는 미운 오리가 아니라, 미운 '아기'오리였습니다. '아기'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기쁨과 행복의 상징입니다. 생의 주기 중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그 무엇도 애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기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누구에게나 소중한 존재가 바로 '아기'입니다. 하늘의 신(神)이 말씀하셨습니다.
'아가야, 세상에 태어나느라고 고생이 많았구나. 네가 어른이 되면 치열하게 살아야 되겠지만 지금은 잠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따뜻한 에너지를 많이 모으거라. 잠시 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단다. 사람들이 네게 주는 사랑을 충분히, 듬뿍 받으렴.'라고...
아기는 동물의 '새끼'와 달리 자립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아기에게 '사랑'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미운 '아기'오리는 불쌍하게도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랑 대신 구박을 받습니다.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구박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가족한테서 말입니다.
"얘는 왜 이렇게 늑장을 부리지?"
할머니오리는 칠면조의 알이라고 버리라고 했지만 엄마오리는 큰 알을 계속 품어 주었어요. 며칠 후, 알이 깨지면서 안에서 덩치 큰 아기오리가 나왔어요.
"정말 못생겼군"
이처럼 미운 아기오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들었던 말은 '정말 못생겼군.'이었습니다. 제가 태어나 처음 들었던 말과 똑같습니다.
'출산 중 난산으로 인한 장애'라는 변명(?)을 평생 구질구질하게 하고 다니는 저도 태어났을 당시엔 부모님께 미운 아기오리였습니다. 누구도 저의 장애를 예측하지 않았기에, 제가 태어나자마자 엄마는 출산의 고통과 장애아를 낳았다는 슬픔으로 혼절하셨고 아빠는 담배만 태우셨다고 합니다. 의사 선생님마저 아기는 오래 살기 힘들다고, 산다고 해도 저능아로 평생을 아프게 살아야 되니 포기하라고 하셨지만 부모님께서는 감사하게도 다시 한번 저를 선택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늘 하셨던 말씀, '서진이 너는 태어날 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겨서 아마 오래 살 거야.'처럼 태어날 때 저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나 봅니다.
그렇게 저는 다행히도 '죽지 않고 사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바보로 살지 않기 위해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은 더 열심히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놀리고 때리는 친구들에게는 저의 노력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나 봅니다. 저는 마치 미운 아기오리처럼 왜 맞아야 되는지, 왜 놀림받아야 되는지 항상 궁금했습니다. 저의 잘못이 아니기에 제가 바꿀 수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해 저의 어린 시절은 외로웠습니다.
그때 제가 스스로 포기하지 않도록 곁에서 힘이 돼 준 사람은 바로 엄마였습니다.
“여기 이 작은 새싹을 보렴. 아직은 여리고 볼품없지만 곧 잎과 키가 자라고 아름다운 꽃을 피울 거야. 그러니 너도 실망하지 마라. 지금은 봉오리에 지나지 않지만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 테니까.”
유년시절, 자신이 적은 동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실망한 안데르센. 그의 어머니는 그를 꽃밭으로 데려가 새싹을 보여주며 위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머니의 위로는 안데르센이 나중에 동화 작가가 되는 데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미운 아기오리가 엄마오리에게조차 구박을 받았다면 백조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안데르센의 실망한 마음을 그의 어머니가 달래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동화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병원에서조차 포기한 저를 엄마가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았다면 제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을까요?
이처럼 삶의 용기를 얻기 위해선 한 사람의 믿음과 사랑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보살펴 준 사람,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게 되는 사람, 그리고 마지막까지 나를 믿어줄 사람, 바로 '엄마'입니다!
동화 <미운 아기오리>는 아기 오리가 화려한 백조로 변신하고 기뻐하면서 끝납니다. 그 미운 아기오리가 '오리'였던 시절, 자신을 믿어 준 유일한 단 한 사람이었던 엄마오리를 만나 함께 기뻐하며 끝났다면 어땠을까요? 과연 엄마오리는 아기오리를 알아챌 수 있었을까요? 아기오리는 엄마오리 곁에, 다른 오리들 곁에 계속 머물 수 있었을까요? 언젠가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헤어지지 않았을까요?
<미운 아기오리> 동화책도 '공주님이 된 00는 왕자님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처럼 '백조가 된 미운 아기오기는 엄마오리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안데르센도 아기오기가 엄마오리 곁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기오리의 가장 화려한 순간에서 이야기를 끝낸 것 같습니다. 안데르센의 복수와 반전은 통쾌했지만, 미운 아기오리는 결국 가장 기쁜 순간마저도 혼자였습니다.
저 역시 제 자신을 '미운 아기오리'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이미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백조처럼 화려하고 멋진 반전을 기대하긴 힘듭니다. 하지만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던 제가, 바보로 살 꺼라던 제가 세상 속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마흔이 되도록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저는 화려한 백조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를 믿어주고 사랑해준 엄마와 항상 함께 있습니다. 엄마가 저의 성장을 보시고 뿌듯해하실 만한 거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조금씩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만의 <미운 아기오리>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비록 화려한 백조가 되진 못했지만 엄마 곁에서 다른 오리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 수 있는 지금에 충분히 감사합니다.
[참고]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 (한 권으로 끝내는 교과서 위인, 2005. 12. 30., 조영경, 백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