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에 일어났습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난 지 13,766일, 5,024,590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못 다 이룬 꿈이 뭐 그렇게도 많은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올해 초 미라클 모닝, 기적의 새벽시간을 통해 자기 계발을 다짐했었습니다. 참 요란하게도 말이죠... 다이어리에 목표를 정리하고 책상 정리도 깔끔하게 했었습니다. '빈수레가 요란하다'더니 요란하게 다짐했던 제 꿈들은 곧 잊혔습니다. 새벽 기상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 지내다가 거의 세 달 만에 새벽에 일어나 봅니다. 그것도 어제 자기 전에 알람을 맞추면서 요즘 유행하는 새벽 4시 30분을 여러 번 설정했다 지우고를 반복하며 저와 타협한 시간이 새벽 5시였습니다! 아침이 오기 얼마 남지 않은 새벽!
오랜만에 만난 새벽 공기가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에도 그는 부지런히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새벽을 느낀 게 봄이었는데 어느덧 계절이 가을이네요. 여름의 새벽은 느껴보지도 못한 채, 가을의 새벽을 느껴봅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저는 항상 부끄럽고 쓸쓸해집니다.
가을은 진중하지 못한 제 성격 탓에, 무엇을 하든 호들갑, 야단법석인 저를 스스로 더 어리게, 어리석게 느껴지게 만듭니다.
더워 죽겠다고 난리 치던 게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찬 새벽 공기에 깜짝 놀라 집 안 창문을 닫습니다. 27~28도로 설정해 놓고 밤 새 켰던 에어컨의 공기보다 방 바깥이 더 시원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며칠 동안의 '전기요금'이 아깝게 생각되네요. 몸에 열이 많던 아들이 늘 덮던 얇은 이불을 남편 배 위에 아무렇게 올려놓고, 남편이 덥고 있던 도톰한 이불을 뺏어서는 아들에게 예쁘게 덮어줍니다. 계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아들은 언제나 내 마음속 일 번입니다. 그러다 문득, 계곡에 물놀이 갔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갑자기 비가 와서 모두 우왕좌왕하던 그때! 원터치 텐트 안에서 아들과 함께 따뜻한 비치타월을 덮고 있었던 저와는 달리 남편은 혼자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짐 정리를 했습니다. 모든 짐 정리가 다 끝난 후, 저와 아들을 히터를 미리 틀어놓은 차로 옮기게 한 후 더 굵어진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원터치 텐트를 정리하던 남편! 괜히 안쓰럽게 느껴져 이불장에서 두꺼운 이불을 꺼내서 나름 예쁘게 덮어줍니다.
물놀이를 다녀온 게 엊그제인데 가을 단풍여행 일정을 그새 머릿속에 그려 봅니다. 올해는 결혼 10주년이고, 결혼기념일엔 회사에 복직한 후라 또 함께 보내지 못할 테니 미리 제대로 다녀와야 될 것 같습니다. 벌써 10년이구나... 아가씨 때는 결혼 10주년이 된 부부는 지겹고 무미건조한 사이로 보였는데, 막상 10년이 돼보니 별 다른 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적당히(?) 좋고 소중한 뜨뜻미지근한... 4계절 내내 몸을 담그기 좋은 딱! 그 온도의 사람입니다.
저를 닮아 땀을 유난히 많이 흘리던 아들에게 매일 손수건을 챙겨 주는 게 일이었는데 오늘은 손수건 대신 얇은 카디건을 챙겨줘야 될 것 같습니다. '계절이 바뀌었으니 옷장 정리를 해야 되는구나!'라고 생각해봅니다. 매년 일하는 딸을 위해 친정엄마가 해주셨는데, 휴직 후 제가 직접 해보니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내년 쑥쑥 자라는 아들놈이 한 철 입을 옷을 준비하는 게 패션감각 없고 쇼핑하는 것을 싫어하는 저에게는 무척 어려운 과제입니다.
20201년 목표를 적은 다이어리도 봅니다. 5분 만에 상반기 결산을 해봤습니다. 목표 10가지 중, 7개를 달성했네요^^ 남은 목표 3가지는 머리를 써야 되는 거라서 미루고 미뤘는데, 이제는 미룰 시간이 없겠구나... 생각해봅니다. '개미와 베짱이'에서 부지런한 개미는 가을에 여유로웠는데... 하반기에 항상 더 바쁜 저는 영락없는 베짱이입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잠시 멈춰봅니다!
또 야단법석이었구나... 반성합니다. 가을은 이렇게도 조용히 다가오고 있는데 또 혼자 빈수레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자신의 할 일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완벽하게 하는 '가을'은 저를 항상 부끄럽게 합니다.
"네가 저렇게 온 자연을 단풍잎으로 물들인다고 생각해봐. 해야 할 때를 놓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저 높고 넓은 산과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사소한 곳까지 변화시키는 자연은 정말 대단한 거야!"
남편의 말이 맞습니다. 저보다 열두 살이 많은 남편, 저에겐 늘 가을 같은 남자입니다.
오랜만에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 알람을 맞춰뒀지만, 무의식 중에 알람을 끄고 자려던 저를 깨운 것은
선선한 가을바람이었습니다.
가을은 어쩜 이리도 조용하게 저를 부끄럽게 만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