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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Oct 23. 2022

맥주&수면제

지난 토요일 하루 종일 박람회 행사에 동원된 덕분(?)에 

목요일 하루 대체휴무를 썼다.


아들 둥이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옷을 챙겨줬다.

둥이를 등교시킨 후

회사에 다니느라 못했던(참 많이 하고 싶었던) 우리 집 청소를 내 손으로 직접 했다.


아들이 마음대로 벗어놓은 옷을 정리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굳이 다리지 않아도 되는

아들의 바지와 티셔츠를 꺼내서 다렸다. 구겨진 주름이 펴질 때마다 나의 고민도 사라지는 것 같다! 

둥이가 반듯하게 다려진 옷을 입으면 더 건강하고 즐겁게 자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다림질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 집을 내 손으로 치우고 나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나의 능력엔 딱 여기까지가 맡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아도 되고 내가 계획한 대로 할 수 있는 일들! 

우리 집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졌다.


분명히 아침에는 기분이 좋았는데 또 금방 슬퍼졌다. 아! 약이 떨어졌구나!

10분 만에 외출 준비를 끝냈다. 

세수를 하고 선크림을 바르고 있는 거울 속의 나에게 현실의 내가 말을 걸었다.

 '이 와중에도 기미, 주근깨가 걱정돼 선크림은 바르는구나! 너 우울증 아니지?"라고.

선크림을 바르던 손이 참 민망해졌다.

거울 속의 나를 비웃고 나니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보통 병원에 갈 때 지하철을 타거나(1코스 거리) 택시를 타는데(기본요금 거리) 처음으로 걸어서 병원에 가고 싶었다. 러닝화를 신으면서 2주 동안 약에 취해 걷기 운동을 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을 듣지 않으려고 이어폰을 일부러 챙기지 않았다.

전화 벨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복사기가 돌아가는 따위의 기계음이 아닌 살아있는 삶의 소리가 듣고 싶었다. 까마귀 울음소리, 아이들 웃음소리, 바람 소리! 

하루 종일 사무실에 갇혀 있느라 듣지 못했던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사 선생님께 나의 약물 남용 습관을 말씀드려야 되는지 마는지' 계속 고민했다. 말씀드리는 게 맞는데 그러면 약을 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지난 한 주 어떻게 보내셨나요?"라고 물어보시는 선생님께, 난 거짓말을 했다.

조금 멍했지만 분노가 줄어 편했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약이 맞는 것 같다며 처음으로 2주일 분 약을 처방해주셨다. 정말 마음이 힘들 때만 먹으라는 상비약까지 받았다. 뭔지 모르지만 빨리 멍해지게 만들 것 같은 그 약을 받으니 꼭 상을 받은 것 같았다. 안심됐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멍해질 수 있는 마법의 약이 내 손에 있다.


하원하고 온 둥이와 아파트 마당에서 발목 줄넘기를 했다. 쉬워 보였는데 발이 엇갈려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둥이 운동화도 한 켤레 사고 함께 산책도 했다. 오랜만에 둥이와 함께 보내는 평일 낮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서 학원도 보내지 않았다.

  "둥아, 엄마가 회사 그만두고 이렇게 둥이랑 함께 산책하고 줄넘기하면 어떨까?"

  "나 학원 안 다니면 바보 된다면서, 오늘은 이렇게 놀고 내일부터는 엄마는 회사, 나는 학원! 알았지? 난 엄마가 큰 건물에서 일하는 게 좋단 말이야."


직장 어린이집에 다녔던 둥이는 한 번씩 내가 일하는 시청, 시의회에 견학 오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엄마가 이 건물에 다닌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지방에는 큰 건물이 잘 없으니 제 눈엔 엄마의 회사가 가장 높게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아깝고 귀한 대체휴무가 끝나갈 때쯤! 남편에게 야근하고 늦게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난 편의점으로 향했다. 캔맥주 4개를 샀다. 약도 있고 술도 있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다행히 둥이가 일찍 잠들었다.


'수면제, 술'을 초록창에 검색해봤다.

<수면제와 술을 함께 먹을 경우 중추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호흡곤란이 오거나 기타 다양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읽은 후 잠시 멈칫했지만 수면제 5 봉지와 항우울제 5 봉지 류미티스 약 5 봉지를 모아 가위로 싹둑 잘랐다. 


약봉지에서 떨어지는 약들을 손으로 귀하게 모았다. 물과 함께 약을 삼킨 후 캔맥주를 마셨다. 그리고 바로 잠이 들었다.


물론, 그다음 날 난 출근을 했고 주어진 업무도 잘 마쳤다. 사춘기 때부터 약을 마구잡이로 먹어서 내성이 생긴 것 같다. 캔맥주를 마실 때도 내일 별 일 없이 출근해 있을 내 모습이 그려졌다. 별 일 없다는 듯 일을 하고 웃고, 수다를 떨고, 밥을 먹을 것이다. 더 슬펐다.


잘못됐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난, 잠시 멍해지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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