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괜찮아도 돼. 울어도 돼.

<그 겨울, 바람이 분다.>

by 이서진
- 사람이 사람한테 해줄 수 있는 건 용서가 아니라 위로야. 내가 처음 뇌종양에 걸렸을 때 내가 바란 것도 위로였어. 근데 사람들은 오빠 너처럼 위로하지 않았어. 위로는커녕 여섯 살 아이한테 용기를 강요했어. 잔인하게. 괜찮아, 영이야. 수술은 안 무서울 거야. 괜찮아. 넌 이길 수 있어. 항암치료? 그까짓 것 별 것 아니야.

- 그럼 사람들이 그 말밖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

- 안 괜찮아도 돼. 영이야, 안 괜찮아도 돼.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난 하루이틀 울다가 괜찮아졌을 거야. 근데, 그때 못 울어서 그런가? 지금도 난, 여섯 살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7화 중>

회사를 잠시 쉬기로 했다.

'정기 인사철도 아닌데 쉬어도 될까? 일이 이렇게 많은데 괜찮을까? 내가 돈을 안 벌면 어떻게 될까?'

지난 일주일간 이런 생각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울었고, 더러운 공중 화장실 변기를 끌어안고 구토했다.


둥이가 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줄곧 혼자 지낸다는 담임 선생님과의 전화 상담 후 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내가 힘들게 보낸 시간 동안 우리 아들은...... 외로웠구나.

엄마인 나라도 옆에 있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주변 직원들에게 큰 민폐를 끼쳐 미안하다는 생각은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 들었다. 너무나도 바쁜 시기에 혼자 쏙 빠져나오게 돼 미안하고 고마웠다. 염치가 없다는 말조차 미안한 상황을 내가 결국 만들었다.


육아휴직 때와 달리 이번 휴직은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가족들은 조금 더 버티지 못한 내게 실망했다. '남의 돈 버는데 쉬운 일 없다'며, 모두 죽을힘을 다 해 버틸 뿐이라고 했다. 나 역시 죽을힘을 다하고 있다고 외쳤다. 정말 죽어가고 있다고 애원했다. 아들이 있어서 참으려고 했지만 집에서조차 구토하는 나를 보던 남편은 결국 쉬라고 했다. 정신적 우울로 인해 신체적 이상이 생긴 나에게 '잠시'쉬라고 했다. 남편이 내게 일을 쉬라고 한 건 처음이었다. 감사했다.


월요일, 화요일, 그리고 오늘이 삼일째.

아들의 등하교를 챙기고 주말 동안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불륜, 출생의 비밀 등 너무 뻔한 줄거리라 한 번만 봐도 내용을 알 것만 같은 아침 드라마도 재밌게 봤다. 그래, 내가 바라는 건 이렇게 사소하고 작은 일상일 뿐인데. 내 살림 내가 하고 내 새끼 내가 돌보는 평범한(누군가에겐 구질구질한) 시간을 참 어렵게도 다시 갖게 됐다.


청소를 하기 위해 드라마를 틀었다. 일종의 '노동요' 같은 것이다.

오늘 내가 선택한 드라마는 노희경 작가의 '그 겨울, 바람이 분다'!

둥이가 태어난 2013년에 방영된 드라마다. 너무나도 멋진 조인성과 새하얗게 예뻤던 송혜교. 거기다 어린 둥이에게 새벽 수유를 하며 화면만 봤던 나만의 추억까지 더해져 좋아하게 됐다.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다시 보는 드라마다.


드라마 덕후답게 감동받은 드라마는 열 번 이상 본다. 똑같은 것을 반복해서 보면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볼 때마다 다른 대사가 들리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에도 그랬다.


안 괜찮아도 돼. 영이야, 안 괜찮아도 돼.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면 난 하루이틀 울다가 괜찮아졌을 거야.
근데, 그때 못 울어서 그런가?
지금도 난, 여섯 살 그때만 생각하면 자꾸 눈물이 나.


항상 힘들어하는 내게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묻는 가족과 친구들.

'다 그런 거다, 괜찮아질 거다. 별 일 아니야. 웃어봐.'라는 그들의 위로는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참지 못하는 나를 점점 더 구석으로 몰았다.


"안 괜찮아도 돼. 무서워해도 돼. 울어도 돼."라는 송혜교의 대사가 귀에 꽂혔다.

"그때 못 울어서 그런가? 지금도 난...... 자꾸 눈물이 나."

청소를 하다 말고 엉엉 울었다. 내가 정말로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비록 지인에게서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위로가 됐다.


실패하거나 넘어져도 된다고.

울거나 슬퍼해도 괜찮다고.

억지로 힘을 내 빨리 일어서지 않고

마음 추스를 수 있도록 충분히 휴식해도 괜찮다고.


이런 말이 참 듣고 싶었다.

타인의 위로를 기대하기엔 머쓱한 어른인지라 말 못 하고 있었는데 드라마를 통해 위로를 받게 됐다.

그것도 청소하던 중에 뜬금없이.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회사로 복귀하겠다던 다짐을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어렵게 얻은 휴식의 시간 동안 마음껏 오랫동안 충분히 울고 또 울어보자.

너무 많이 울어서 더 이상 울 수 없을 만큼 울어야겠다.

언젠가,

"2023년엔 많이 힘들었어. 하지만 이젠 괜찮아. 그때 충분히 많이 울었거든."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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