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습기 물통을 비우다가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둥아, 이제 정말 가을인가 보다. 이것 봐. 제습기 물통에 물이 없어. 이제 곧 가습기 틀어야 될 수도 있겠네. 하늘도 참 예쁘고. 저렇게 하늘이 맑고 투명해서 공기 중에 물방울이 사라진 걸까?"
하교 후 책가방을 정리하던 둥이. 내 말을 듣더니 가방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곁으로 온다.
"엄마, 여름방학 때 기억나? 이렇게 창문 앞에 서서 비 오는 풍경을 같이 봤잖아."
"그랬었지. 그때도 참 좋았는데."
"엄마, 다시 비가 그립지 않아?"
"비가?"
둥이는 손에 들고 있던 구겨진 종이를 펼치더니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짠! 내 시험지엔 비가 내리고 있어."
둥이가 들고 있던 종이는 오늘 학교에서 쳤다는 국어 단원평가 시험지였다. 새하얗고 깔끔했을법한 시험지는 꼬깃꼬깃 구겨져 있었고 빨간색 색연필로 그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줄기를 따라 올라가니 오른쪽 귀퉁이에 점수가 적혀 있었다.
50점! 아이코! 여느 엄마라면 화를 내고도 충분히 남을 법한 점수를 보고도 화는 나지 않았다. 둥이가 지능이 낮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둥이의 시험 점수는 내게 아무 의미 없는 숫자가 됐다. 대신 오답을 체크한 것을 '시험지에 내리는 비'로 표현했다는 게 예뻐 보였고 내 눈치를 보는 둥이가 안쓰러워 보였다.
"어머니, 저는 둥이의 지능이 그렇다는 것을 믿을 수 없어요. 우리 둥이 절대로 포기하시면 안 돼요."
학교선생님도 엄마도 포기한 둥이를 유일하게 믿어주는 한 사람. 바로 공부방 선생님이다. 엄마보다 더 둥이를 챙겨주시는 공부방 선생님의 노력 덕분에 수학 단원평가 점수는 80점 이상을 받아온다. 그러면 난 백점을 받은 것보다 더 기뻐하다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우리 둥이가 정말 지능이 낮다고? 아닐 거야.'
하지만 허락 없이 샘솟은 희망은 금방 꺾인다. 수학 점수와 상관없이 곱하기 나누기 분수, 소수가 섞여 있으면 그 의미를 항상 헷갈려한다.
"둥아, 근데 어떻게 문제를 풀었어?"
"몰라, 공부방에서 푼 문제랑 똑같은 게 많았어."
혹시나 해서 똑같은 문제에 숫자만 다르게 적어줬다. 역시나 풀지 못했다. 둥이의 수학 점수는 기계적 훈련의 성과였던 것이다.
다시 국어로 돌아와서,
"둥아, 엄마랑 천천히 틀린 거 읽어보자."라고 말하며 둥이와 나란히 국어지문을 읽는다. 초등학교 때, 유독 지문을 못 읽던 남자아이가 생각났다. 그 아이도 둥이처럼 지능이 낮았던 아이였다. 이름도 기억난다. 인철. 인철이가 글을 읽을 때면 반 친구들이 웃곤 했다. 나도 웃었던가. 내 웃음이 칼로 변해 내 아들을 향하다니.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칼에서 둥이를 지켜주고 싶다. 옆에 앉아있는 커다란 둥이를 내 무릎 위에 앉혔다. 다시 아기가 된 것 같다며 깔깔 웃으며 내 품을 파고드는 둥이와 국어 지문을 번갈아가며 읽었다. 둥이가 읽을 때는 온몸으로 둥이를 꽉 안아줬다. 둥이를 보호하고 싶다.
둥이의 점수는 아무 의미 없다. 하지만, 주룩주룩 빨간 비가 내린 시험지를 보고 여느 엄마처럼 한 번쯤은 화를 내고 싶다. 화를 낸다는 건 욕심을 부린다는 것이니까, 아이가 그만큼 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