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한 지 한 달이 지났다. 길고도 짧은 삼십일.
아직도 덥지만 어쨌든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바뀌었고, 추석도 있었다.
마흔이 넘어서인지 아파서인지 낯짝이 두꺼워서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나를 보는 눈빛과 나를 얘기하는 듯한 그들의 목소리에 많이 무뎌졌다. 덕분에 새로운 팀원들과는 이삼일도 안 돼 익숙해졌다. 나를 어떻게 보든지 신경 쓰지 않게 되자 회사에서도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큰 깨달음을 얻고 있던 중, 이상하고 황망한 일이 생겼다.
그날은 비가 많이 오던 토요일이었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이틀 출근 후 다시 맞는 주말이었으므로 비가 많이와도 기분은 화창한 날이었다. 코로나가 끝난 지 오래됐음에도 여전히(전보다 더) 대면접촉을 싫어하는 나를 위해 친구들이 보내 준 모바일 쿠폰이 쌓인 카카오톡 선물함을 보던 중 베스킨라빈스아이스크림 쿠폰이 눈에 띄었다. 남편의 조카가 보내 준 하프갤런 교환권이었다. 나이답지 않게 손이 큰 그 아이에게 고맙다고 생각하며 여섯 가지 맛을 신나게 고르고 있었다. 슈팅스타 두 개, 레인보우샤베트 두 개, 남은 두 가지 맛을 고민하던 중 전화가 왔다. 전화는 큰 시누이에게 온 것이었고 내용은 큰 조카가가 오늘 새벽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내게 아이스크림 쿠폰을 준 그 조카가, 죽었다니.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전화였다. 나는, "곧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손님, 남은 두 가지 맛은 어떤 것으로 드릴까요?"
직원의 물음에 기억도 나지 않는 맛 두 가지를 추가로 말한 후 나는 의자에 앉았다. 매장에 울리는 흥겨운 음악소리, 원색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매장,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는 직원의 모습이 각각 분리된 채 세상에 둥둥 떠있는 거 같았다. 소리와 선명한 색의 느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공간에서 나의 감각만 쏙, 삭제된 것 같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고 화면엔 그 아이가 준 쿠폰이 띄어져 있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지만 그 아이의 죽음에 대해선 더 이상 적으면 안 될 것 같다. 단지, 뭣도 모른 체 죽음을 동경했던 시간이 참 많았던 내가 남겨진 가족의 일원이 된 느낌을 적어두고 싶었다. 그 느낌에 딱 맞는 단어를 찾기 힘들 만큼 이상했고 멍했다.
마지막을 생각하며 적은 유서를 직접 만져보고 눈으로 읽는 것, 마지막을 선택한 장소에 대해 듣고 있는 내가 낯설었다. 아, 남겨진 가족들은 이런 과정을 겪는구나. 슬퍼도 슬프다고 할 수 없구나. 슬픈 와중에 결정해야 되는 것들이 있구나. 한 사람이 사라지면 누군가의 한 세계가 닫히는 거구나. 가슴에 묻는다는 것,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다는 게 이런 말이었구나. 가슴속 깊은 울림을 느끼는 내내 죄스러운, 시간이었다. 남겨진 가족의 슬픔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잔인했다.
얼마 전, 심하게 손이 떨려 급하게 신경외과 외래진료를 받았다. 교수님은 내게 경미하지만 뇌경색 증상이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뇌성마비를 앓아온 사람들의 증상일 수도 있는데 알고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고 하셨다. 하지만 이미 처방되는 약물이 독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처방도 어렵다고도. 이 약은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저 약은 간 손상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알고 있지만 먹어야 되는 이른바 약물 부작용의 사이클 속에 이미 들어온 것 같다. 세상에 답이 없는 게 내 건강뿐일까.
타고난 장애 때문인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늘 생각했던 나는 몇 년 전부터 추가되는 병명들과 아들의 ADHD와 지적능력 저하로 더욱더 그것을 갈망했었다. 지인들의 부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슬픔보다 사람이 바뀐 것 같은 생각에 더 괴로웠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최소한 내 가족들을 소위 '남겨진 자'로 만들면 절대로 안 되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나'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고통을 느끼게 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열심히, 잘, 최선을 다해서 살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그들 옆에 '존재' 하는 것! 그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 되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