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 너 빨리 안 갈 거야? 빨리 꺼져!
정혁은 은수가 보낸 문자에 답은 하지 않고 커피를 주문했다. 아무래도 계속 앉아있을 생각인가 보다. 셋은 아무 말 없이 음료만 마셨다. 침묵을 깬 건 정혁이었다. 뜬금없는 등장과 맥락 없는 이야기, 다영은 갑자기 나타난 정혁이 불편했다. 은수는 혈기왕성한 남학생의 엉뚱한 에피소드를 쉴 틈 없이 얘기하는 정혁이 짜증 났다.
"다영아, 은수 이놈이 그렇게 엉뚱했다니까. 그런데 네 얘기를 할 때면 차분해졌어. 다른 사람이 됐었지.
다영이도 은수도 답이 없었다. 정혁은 혼자서 말하는 게 지치지 않는 듯 질문과 답을 끊임없이 말했다.
"다영아,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내가 학교 구경시켜 줄까?"
다영은 정혁의 무례함이 싫었지만 은수랑 어색하게 있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아 핸드백을 들며 일어섰다. 두 남자들도 다영을 따라 일어섰다. 계산은 은수가 했다. 정혁이 마신 것까지 계산하기 싫었지만 다영이에게 구두쇠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셋은 커피숍 건물을 나서 교차로 횡단보도 앞까지 걸어갔다. 차가 열대쯤 지나갔을 때쯤 횡단보도의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학교 안에 구경시켜 줄 생각에 혼자 들뜬 정혁이 앞서갔다. 은수와 다영은 조용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은수가 갑자기 다영의 손목을 잡더니 오른쪽 횡단보도를 향해 뛰어갔다.
"야! 너네 둘 어디로 가는 거야! 같이 가야지."
"우리가 너랑 같이 왜 가냐? 학교 가서 운동이나 더 해. 난 다영이랑 놀다가 갈게."
건넜던 횡단보도를 되돌아오려는 정혁 앞으로 차들이 쌩하고 달렸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뀐 것이다. 은수는 이 기회를 놓칠까 봐 다영의 손을 잡고 다시 골목으로 뛰었다. 얼마큼 뛰었을까, 다영의 속도가 늦어지는 것 같자 은수는 멈췄다.
"미안, 많이 힘들었지? 정혁이 저 자식이 따라올까 봐. 난 너랑 둘이서만 보고 싶거든."
다영은 힘들게 숨을 내쉬었다. 은수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일종의 배신감도, 갑자기 나타난 정혁이란 친구의 황당함도 숨 막힘에 잊어버린 것 같았다. 다영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은수의 손을 쳐다봤다. 둘의 호흡은 조금씩 제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
"다영아, 우리 사귀자!"
다영은 아무 말 없이 환하게 웃는 은수를 바라봤다.
천천히 안정되던 두 사람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