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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진 May 08. 2021

친구가 잘 못 되면 눈물을, 잘 되면 피눈물을 흘린다.

다이아몬드 사주를 타고난 친구

나 아닌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게 정말 가능할까?


속이 너무너무 좁은 나는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진작에 인정했다.

피가 섞인 가족의 행복은 축하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삼촌, 사촌, 오촌...처럼 섞인 피의 농도가 옅어지면 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생겼나 보다.


푼수끼가 있는 나와 달리, 차분한 '은영'이는 나와 같은 학원을 다녔다. 다른 중학교를 다녀 자주 볼 수 없었던 우리는 비밀 일기장을 교환하며 마음을 나누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교환일기는 고등학교 때까지 쭉 이어졌다. 몰래 짝사랑하는 남학생, 우리 가족만 아는 이야기도 은영이와 공유했다. 영혼의 친구라 믿었고, 비밀이 없었다. 그렇게 우린 서로의 소녀시절을 기억한 채 대학생이 됐다. 운이 좋게도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경영학과였고 은영이는 컴퓨터공학과였다. 비록 전공은 달랐지만 서로 수업을 몰래 도강하며 여전히 친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은영이에게 남자 친구가 생겼다. 중학교 때 짝사랑하는 남학생이 생기면 우리의 일기장은 더 바빠졌다. 그 남학생에 대한 이야기, 설레는 마음... 을 일기장에 적었다. 하지만... 짝사랑이 아닌, 진짜 애인이 생긴 후론 우리의 일기장은 조용해졌다.


은영이는 나에게 얘기하고 나와 의논했던 것들을 남자 친구와 의논하기 시작했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시간이면 여자 휴게실에서 만날 수 있었던 은영이었는데 이젠 만날 약속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서운했던 나는 은영이에게 괜한 심술을 부렸고 은영이는 그런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날 멀리하기 시작했다. 우리 사이에 처음으로 거리가 생겼다. 그때가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이었다.

서운해하던 나에게도 남자 친구가 생겼다. 빨간 머리 앤과 다이애나처럼 영혼의 단짝 친구였던 나와 은영인 그냥 친한 친구가 됐다.


다시 시간이 흘러 은영이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게 됐고, 이별을 무척 힘들어하다가 유학을 선택했다. 은영이는 유학 가기 전에 유명한 사주카페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은영이를 처음으로 부러워하고 시샘하게 된 바로 그 날이다. 은영이의 사주를 봐주던 분은 은영이 얼굴을 한번 보더니 아주 환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아가씨는 금 사주를 타고났네. 그것도 아주 환한, 다이아몬드 사주야.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누구를 만나든 손에 물 안 묻히고 편하게 살 팔자야. 공주님보다 더 귀한 다이아몬드 사주라고!"

하필, 그날은 동사무소에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된 내가 교도소에서 출소한 민원인을 처음 응대한 날이었다. 칼을 들고 다 죽이겠다고 덤비는 아저씨에게 호되게 당해 눈물 콧물 다 흘린 날이었는데... 훨훨 멋진 곳으로 유학 간다는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 그런데 심지어 '다이아몬드'사주라니... 난 시녀의 사주팔자를 타고나서 내 힘으로 먹고살아야 되는데. 역시 '다이아몬드' 사주팔자라 돈 걱정 안 하고 유학도 가고, 심지어 남은 인생도 편안하게 잘 산다고 하니까... 배알이 꼬였다.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싶었다.


몇 년이 다시 흘렀다. 지금 남편과의 결혼 진행이 순탄치 않아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은영이가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며 연락이 왔다. 점심시간에 구청 앞에서 만나 같이 밥을 먹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은영이는 내게 청첩장을 내밀었다. 은영이는 미국 유학 중에 만난 남자와 결혼한다고 했다. 결혼 후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다. 그리고 예쁜 노란 나비가 붙어 화려한 청첩장을 줬다. 서울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친구가 많이 없어서 고민이라며 내가 꼭 참석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미국, 영국, 유학, 서울.... 미국, 영국, 유학... 영국, 유학... 유학......'

은영이와의 대화에 집중이 안됐다. 유학... 역시 은영이는 다이아몬드 사주를 타고난 아이였다. 그때의 난 시댁에서 '아기를 낳을 수 있는지 증명하기'라는 어려운 숙제를 받아와 머리가 아팠다. 밤낮으로 야근하고, 시댁에서 미움받고 있는 내 마음에 은영이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여유는 없었다. 내 속이 정말 좁다는 걸 다시 한번 알게 됐다. 내가 소인배라는 사실조차 화가 났다.


당연히 결혼식엔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후 은영이도 보지 못했다.


다시 몇 년 후, 은영이에게 이메일이 왔다.

미국 유타주에서 사는데 내가 좋아하는 재즈 피아노 리얼북 악보가 많다고 했다. 좋아하는 음악가를 회신해주면 악보를 찾아 우편으로 보내준다는 내용이었다. 답장을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그리고 네이트온이 없어지면서 이메일도 끊어졌다.


그렇게 은영이를 못 본 지 10년이 지났다.


금요일 저녁 남편과 둥이 공부방을 만들어 주기 위해 대청소를 하다가 우연히 은영이와 주고받았던 '교환일기'를 찾았다. 세 권이나 됐다. 내 방에 놔두고 청소를 마무리했다.


토요일 오후, 남편이 혼자만의 시간을 선물로 주겠다며, 둥이를 데리고 외출했다.(고마운 남편^^)

주말 오후... 카누 커피 한잔을 타서 은영이와 함께 적은 교환일기를 천천히 읽어봤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내 10대처럼, 오랜만에 은영이가 너무 그리워졌다. 차분한 은영이는 내가 시샘을 부린 것도, 왜 부렸는지도 다 알고 있을 텐데... 이메일 주소도 기억이 안 나고 인스타나 페이스북의 친구 찾기 알고리즘을 아무리 봐도 은영이는 없다.


세상에... 십 년이 훨씬 지나서야 나의 좁은 마음 때문에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는 걸 알았다. 이젠 다이아몬드 사주를 가진 내 친구를 부러워하지 않고 만날 수 있게 됐는데... 은영이가 내 옆에서 없어졌다.


언젠가 기회가 돼 은영이를 만나게 된다면 함께 꼭 불러보고 싶은 노래가 있다. 바로 여행스케치의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 혼자 노래를 들으면서 열심히 인스타가 추천해주는 친구 목록을 좀 더 찾아봐야겠다.


은영아, 그땐 내가 정말 미안했어. 정말 보고 싶구나...



<산다는 건 다 그런 게 아니겠니 / 여행스케치>


너는 어떻게 살고 있니 아기 엄마가 되었다면서

밤하늘에 별빛을 닮은 너의 눈빛

수줍던 소녀로 널 기억하는데 


그럼 넌 어떻게 지내고 있니 남편은 벌이가 괜찮니

자나 깨나 독신만 고집하던 네가 나보다 먼저 시집갔을 줄이야

어머나 세상에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데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지금도 떡볶이를 좋아하니 요즘도 가끔씩 생각하니

자율학습 시간에 둘이 몰래나와 사 먹다 선생님께 야단맞던 일

아직도 마음은 그대로인데 겉모습이 많이 변했지

하지만 잃어버린 우리 옛 모습은 우리를 닮은 아이들의 몫인걸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겠니 원하는 데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야 두렵기는 해도

산다는 건 다 그런 거야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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