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가고 있다 - 작은 조각들 (4)
시칠리아 시골 마을에서는 2016년부터 오랫동안 방치되어온 빈집을 1유로에 판매하는 정책을 시행 중이다. 도시로의 이동, 인구 감소로 10년 이상 비어있는 집이 많아지면서 고안된 것. 1유로 집을 사게 되면 3년 이내로 인테리어를 고치고 입주해야 한다. 집들은 대부분 오래되었기 때문에 인테리어 비용과 세금 등을 합하면 상당한 돈이 든다. 영국 유명 레스토랑에서 셰프로 일하다 시칠리아로 이주한 한 호주인은 1유로에 집을 사서 몇 년 뒤 시세를 올려 팔 욕심은 버려야 한다고 장담한다. 1유로 주택의 목적은 마을 공동체를 되살리고 보다 건강하고 살기 좋은 마을을 만들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는 슈퍼에서 남은 식재료를 받아 만든 맛있는 요리를 코로나19로 힘든 주민들과 나누는 프로젝트를 기획 중이다.
문득 3년 전 갔었던 이탈리아 북부의 그로모 마을이 생각난다. 산 중턱에 성과 작은 집들이 붙어있는 마을 그로모. 그곳은 마을 공동체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곳을 다녀와서 쓴 짧은 글이 있다.
Gromo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가장 놀랬던 건 깊은 산속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산다는 것.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많다는 것. 숙소의 호스트였던 알렉스는 '너무 조용한 동네야'라고 진저리 쳤지만, 나는 '너무 부러워'라고 답했다. 조그마한 광장에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모여 빙고게임을 하고 2층 창문에서 건너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곳. (실제로 그날 도시에서 사는 알렉스의 친구들이 놀러 와 있었고, 나의 방 2층 창문 건너편에서 그들이 인사를 건넸다. ‘Nice to meet you’) 그리고 다음 일정인 등산을 위해 필요한 샌드위치 재료를 살 때, 알렉스는 나를 한 식료품점에 데려다주었다. 그곳은 알렉스의 친구가 운영하는 가게였다. 알렉스는 익숙한 듯 빵과 치즈를 골라주었다. 당연한 듯이. 그 오랜 유대감과 친밀감이 부러울 뿐이었다.
재료를 모두 사고 숙소 계단을 오를 때 토마토도 있으면 좋겠다고 하자, 알렉스는 '지금쯤이면 문을 닫았을 텐데! 창문에서 채소가게가 보일 거야. 아직 열려있는지 봐봐'라며 숙소 문을 열어주었다.
2층으로 올라가 짐을 두고 넓게 트인 테라스로 나왔다. 그리고 밑을 보니 좁은 골목길 어귀에 놓인 빨간 토마토들이 보였다. 내려가 볼지 망설이는 사이 알렉스가 문을 두드렸다.
‘마침 우리 집에 토마토가 있네. 이거 가져가!’
이처럼 나는 사람과 사람이 이어져있는 공동체에 관심이 많다.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 살고 싶다. 새로운 것을 갖는 것보다 지속적이고, 고립되는 것보다 도움을 주고받으며 행복을 공유하는 삶.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나는 왜 공동체에 관심이 많을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잦은 이사와 유학생활로 정착한 곳 없이 살았다. 그 경험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고,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정착하는 삶을 원하게 되었다.
그저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다.’라는 소망을 품기 이전에 공동체 안에서 도대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 읽고 있는 책 ‘자기 결정’에서는 이렇게 질문하기를 제안한다.
<나는 나의 경험들 안에서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
<그중 특정한 요인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트라우마가 있었는가?>
<어떻게 하나의 경험이 또 다른 경험으로 발전되었는가?>
<나의 사고와 경험 가운데 서로가 일치하는 것과 모순되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나는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걸 원한다고 생각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요즘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살아왔듯 살아갈지,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 볼지. 예를 들어 (꿈같은 망상이지만) 언젠가 내가 시칠리아의 어느 한 마을로 이주를 하게 된다면. 1유로 주택을 사서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실컷 산과 바다를 오르내리다가 집으로 돌아와 매일 밤 글을 쓰고 있다면. 그 선택이 자기기만이 아닌 자기 결정으로 이루어진 건강한 선택이길 마음 깊이 바라는 것이다.
* 알렉산드라가 건넨 빨간 이탈리아 토마토
- 덧.
요즘 읽고 있는 또 다른 책. 한 섬에서 살아가는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를 그린 토베 얀손의 '여름의 책'이다. 초반에 섬사람들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섬과 섬사람에 대한 의구심보다, 부럽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오래된 전통과 유대감. 그것은 내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것이기에.
'언제나 함께 살아온 사람들. 구석구석을 다 아는 땅에서 주인으로서 자신들의 습관에 따라 서로의 주위에서 움직이던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사는 그 한가운데로 누가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닌가. 그들 습관에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것이 생기면 그들은 더욱 단합하고 더욱 단단해진다. 밖에서 오는 사람에게 섬은 끔찍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완성되어있고 자기 자리와 고집이 있으며, 여유롭고 자신들만으로 충분하다. 모든 일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진 관습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한편으로는 마치 세상이 수평선에서 끝나기라도 하듯이 되는대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토베 얀손 '여름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