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행성이지만 미라클 모닝은 가능하다>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야행성으로 살았을 것이다.
대학생 때는 아침 동틀 무렵 잠이 들어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잠들었다. 이 생활을 바꾸게 된 것은 직장생활을 하고부터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오전을 잠으로 보내고 오후부터 새벽까지 쓰는 자유롭게 쓰는 시간은 출근에 메이지 않은 학생이어서 가능했던 느낌이다. 오전 수업에는 출석 후 내내 졸았다. (교수님 죄송해요~ 이랬던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며 졸고 있는 애들이 남일 같이 않아서 야단을 치지는 않는다.)
내 체질상 야행성 생활이 잘 맞았다.
야행성이다 보니 새벽까지 깨어있는 것에 재능이 있었다. 이것은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했다.
오히려 일찍 자고 새벽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야행성을 반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신입사원일 때는 그 장점을 백분 이용하여 새벽에 영어학원을 다녔다. 물론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기상을 꽤 잘하는 편이었다.
원래부터 야행성이었으므로, 새벽은 나의 시간이었다.
직장인으로서 갓생을 사는 방법은 새벽기상, 미라클 모닝 밖에 없다. 저녁시간은 약속도 있고 야근도 해야 하고, 피곤해서 쉬고 싶은 마음 때문에 무엇을 못할 변수가 너무 많다.
학생일 때 밤새도록 혼자 그 고요한 새벽 속에서 집중하며 집필하고 디자인하는 시간이 그렇게 몰입이 잘 되었다. 그리고 그 고요와 집중의 시간을 즐겼다.
새벽은 몰입의 시간이었다.
대학시절의 그 새벽녘 고요와 집중을 잊지 못해 다시 새벽 기상을 시작했다.
일찍 일어나서 새벽을 활용하고 있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잠을 자지 않아서 활용했던 새벽이었다. 일찍 일어나든, 늦게까지 잠에 들지 않든 어쨌든 다른 의미로 새벽이 맞닿은 시간이다.
대학원 시절 밤새 논문을 쓰며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여름에는 날이 밝아갈 때 집에 갔다.
겨울에는 새벽 별을 보며 집에 갔다.
석사시절 하교는 대체로 아침 5~6시 사이였다.
그 새벽, 나는 크게 조급하지 않았다.
차분히 앉아 내가 해야 할 것을 했다. 새벽 시간을 쌓아가면서 내가 엄청나게 많은 일들을 해내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논문에 필요한 글을 썼고, 레퍼런스로 수록할 디자인을 만들었다.
쫓기는 마음이 없었다. 성실한 이 시간을 즐기는 마음도 있었다.
이 밤은 온전히 나의 것이었다.
그 새벽이 하루하루 쌓이면서 논문도 조금씩 완성이 되어갔다.
논문을 기한 내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멀리 보며 초조해하기보다 새벽 시간을 쌓아가면 어떻게든 될 수 있다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만큼 새벽 시간은 내가 주도해 가며 나를 믿는 힘이 있는 시간이다.
요즘의 내 새벽 시간은 대학 시절 늦은 수면과 달리 이른 기상으로 시작된다.
아침에는 출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 기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새벽 기상에 초조해하기보다 내 시간을 만들어본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눈을 뜨고 있다.
대학원생일 때 논문으로 너무 압박받지 않던 그 마음처럼 여유 있는 기준을 두고 있다. 원래 내가 느긋한 성미가 아니지만 새벽의 이 시간만큼은 느긋한 마음과 여유로 대하고 있다.
나머지 낮동안에는 너무나도 스스로를 푸쉬하는 시간이기에 새벽 시간의 풀어짐은 오히려 나에게 기다려지고 기대되는 시간이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엄청난 무엇을 해내리라는 굳은 결심보다는 즐기는 마음으로 맞이하고 있다.
시간도 무조건 5시 기상이라는 압박보다는 4시 부터 5시 30분 사이 내 몸이 허락하는 시간에 일어나고 있다. 이런 기준 속에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알람 없이 편안하게 눈을 뜨고 있다.
알람이나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면 잠을 쫓기가 상당히 힘들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내가 눈을 뜨게 될 때 기상을 하면 잠에서 빠져나올 때 몸이 상당히 가볍고 편안하다.
억압이나 부담이 없고 그저 즐겨보겠다는 마음이니 새벽 기상은 지옥 같은 기상이 아닌 소중한 시간으로 여기게 된다.
나는 아마 J 중에서 가장 P 같은 사람일 것이다. 내 기상 목표는 분초 단위로 엄격하게 결정 되지 않는다.
이런 나의 새벽은 기준과 계획이 비교적 관대하게 설정되어 있다. 너무 엄격하면 포기하기 마련이다.
나는 마음의 부담을 가장 잘 못 이기는 성격이다. 내가 지속하려면 부담 없이 편안해야 하고 내가 즐기려면 압박 없이 내 손으로 조율이 가능해야 한다.
긴장하고 쫓기면 말아먹는 성격이다.
3년째 매일 하고 있는 요가도 마찬가지로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못해도 되고 허술해도 되지만 매일 하는 지속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지속성을 목표로 한다면 너무나 빈틈없이 엄격한 기준과 완벽성을 내려놔야 한다.
지나친 완벽성은 사람을 멈추게 만든다.
오죽하면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이 있지 않을까?
나는 허술함과 어설픔을 받아들이고 계속함을 선택했다. 완벽하지 못한 못난 나보다 작심 3일 혹은 시작조차 못하는 내가 더 나를 속상하게 한다.
처음엔 별 볼 일 없지만 그저 꾸준한 시간만 쌓아가면 그 시간의 축척은 어떤 농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논문을 무사히 마무리 지었듯이 말이다.
낮 시간에만 논문을 썼다면 과연 내가 이것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하고 고민하는 시간으로 집필시간을 많이 허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새벽은 이런저런 생각 없이 그냥 실행하게 했다.
새벽은 고민보다 몸이 직접 움직이게 했던 시간이었다.
새벽, 더 이상 물러설 시간이 없었다.
새벽 기상을 시작하며 나는 아주 타이트한 기준을 잡기보다 내가 해낼 수 있는 허용치를 넓게 잡았다.
무조건 해냄보다 지속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갔다.
엄격성 아래에서는 마음이 부담되어 도무지 오랫동안 지속하기가 쉽지가 않다. 자연스럽게 기준을 관대하게 설정하면 마음이 무겁지 않다.
이런 탄력적인 기준 아래에서는 어떤 상황도 실패로 규정지을 필요가 없다.
4시 반에 일어나도 성공, 5시 40분에 일어나도 성공이다.
어쨌든 출근 시간 전에 내 몸이 허락하는 만큼 자유시간을 가져보자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
그날그날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는 시간이 기상시간이다.
독서를 해서 엄청난 지식을 쌓고 성장하여 성공을 쟁취하겠다는 마음보다, 즐겁게 지식을 탐닉하는 시간으로 새벽을 보내고 있다.
이 오랜 독서를 통해 내 생활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좋다. 그냥 내 인생에 있어 시간의 주도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했다.
삶에 대한 만족도는 자신이 다양한 상황에서 주도권을 갖게 될 때 더욱 높아진다.
내가 주체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무력감이 생긴다. 이런 상황에서 우울증이 오기도 하고 자기혐오가 생기기 쉽다.
새벽 시간은 내가 선택하여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내 주도하에 있는 굉장히 소중한 시간이 된다.
이 새벽의 활동은 회사 업무도 아니고 누가 돈 주고 나에게 의무를 다하게 시킨 것도 없다. 그러니 실적의 압박도, 성공에 대한 부담도 없이 그저 그 시간을 내 권한 아래 놓고 원하는 대로 즐기면 된다.
우리 인생에 그런 자기 주도적인 시간이 1~2시간이라도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모습은 상당히 달라진다.
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남이 감시할 때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수동적인 일개미로 나를 묶어두지 않으려면 나 스스로 만들어가는 시간들이 분명히 있어야 한다.
내 주도 아래 쌓여간 시간들은 나를 더 의미 있고 힘 있게 만들어간다.
우리는 평생 한 번은 자기만의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년 이후에 혹은 그보다 빨리 회사에서 벗어난다면, 자기 주도성이 없는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요즘은 어린아이들에게 조차 자기주도 학습이라는 공부법을 강조한다. 그만큼 남이 시켜서, 꼭 해야만 하는 어떤 강제된 시간보다는 스스로가 선택하여 만들어가는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더 의미 있는 것들을 만들어갈 수 있다.
학창 시절 즐기며 했던 야행성 인간에서, 어쩔 수 없이 출근을 위해 아침형 인간으로 등 떠밀려 살다가,
다시 최근에는 내가 주도하는 새벽형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사실 아침 일찍 일어나냐 늦게 일어나냐가 관건은 아니다.
얼마나 내가 주도하는 시간을 만들어내냐는 것이 중요하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인생의 숙제를 풀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의무를 다해야 하는 일들을 처리하며 등 떠밀리는 시간만 살아내고 있다.
나를 위한 내 시간이 없다는 것은 노예의 삶과 사뭇 비슷하다. 슬프지 않은가?
우리는 누구도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