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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Jun 24. 2024

84.채소 어디까지 데쳐봤니?

<아니 누가 상추를 데쳐 먹냐고??????>


채소의 계절, 여름. 

며칠 전의 식중독 여파로 생채소 섭취를 금지당했다.


그러나 채소쟁이 나에게 이 계절을 그대로 놓칠 수 없는 법.

게다가 냉장고에 사다 놓은 채소들도 가득한데 어쩌겠는가. 방법을 고민했다.


그렇게 나는 모든 채소를 데쳐 먹기로 했다.

생채소를 즐길 때는 불 없이 커팅만으로 즐거운 식사시간이 되었지만, 데치는 건 여간 힘들고 귀찮은 일이 아니다. 여름에는 물을 팔팔 끓이기부터가 챌린지가 된다.

요즘 같은 날씨, 30도가 넘는 온도라면 시원하게 생채소를 즐기고 싶지 그걸 데치느라 온 집안을 찜질방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없다.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채소는 대부분 생으로 먹고 있고 가끔 굽거나 볶아 먹기는 잘했어도, 데친 채소를 먹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가 아는 데친 채소란 양배추 아니면 브로콜리 정도.

이 마저도 회사 직원식당에서 볼 때가 아니면 직접 해먹을 일이 거의 없다.


집에서 밥을 거의 해 먹지 않기도 하고 한식 나물 반찬류는 손이 많이 가니까 데쳐야 만들 수 있는 채소 음식은 만들어볼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늘 효율을 추구하며 채소는 생으로만 먹었다.


식중독 이후 채소를 즐기기 위해서는 무조건 데쳐서 소독된 채로 먹을 수밖에 없다.

생채소는 어떤 양념이 없어도 채소의 향과 식감으로 즐기기 좋지만 사실 데친 채소는 양념 없이 먹기가 밍밍하다. 

데친 뒤에는 생채소만큼의 풍미가 없어진다는 점이 좀 아쉽다. 

그렇게 데친 채소는 양념에 버무려내야 완성이 된다.


그러나 채소를 데치는 건 너무 귀찮다.

그래서 편법을 이용하기로 했다.

처음엔 무식하게 냄비에 물을 펄펄 끓여서 온 집을 고온다습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채소를 데치는 건 10초에서 1분 이내. 물만 팔팔 끊으면 되지 않겠는가?

식중독 균이 죽는 것은 85도 이상이면 된다고 한다.



편법 1.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이 방법은 냄비로 물을 끓이는 것보다 집안 온도를 올리지 않는다.

도자기 그릇에 채소를 썰어 넣고 컵라면처럼 그릇 안에 물을 붓는다. 30초 정도 흐른 뒤 물을 버리고 채반에 건져 찬물에 헹군다. 

데치기가 참 쉽다. 


편법 2.

다음으로는 전자레인지용 실리콘 지퍼팩을 활용했는데, 이건 전자파가 좀 걱정되기도 하고 시원하게 팔팔 끓여 소독하는 맛은 없다. 

실리콘 지퍼백 바닥에 물을 자작하게 붓고 채소를 넣어 전자레인지에 몇 분(채소마다 시간이 달라서 꺼내서 종종 확인이 필요함) 돌린 뒤 꺼내면 된다.

지퍼팩을 열 때 화상을 주의해야 한다. 뜨거운 증기가 순식간에 확 나오므로 집개나 젓가락으로 입구를 여는 것이 좋다. 

당근처럼 딱딱한 채소도 아주 보드라운 감자 식감으로 익어 나온다.

시원하게 끓이는 맛은 없지만 제대로 살균은 되었을 느낌이다. 왜냐면 막 지퍼백을 열다가 내 손이 살균될 뻔했으므로.



이렇게 편법 1번을 활용해 오늘 저녁을 먹었다.

한식 양념 특유의 맛이 더해져 데친 채소들은 하얀 쌀밥의 단짝 친구가 된다.

생채소를 즐길 때는 쌀밥을 먹지 않았다. 그러나 데친 채소에 양념을 더하니 밥 없이 먹기가 힘들다. 

맛이 너무 좋다는 뜻. 고작 데쳐서 양념한 채소가 밥도둑이라니 믿기 힘든 현실.


저녁으로 상추와 깻잎을 데쳤다. 그리고 간장양념에 버무렸더니 맛이 너무 좋아서 밥에 비벼 비빔밥으로 한 그릇 가득 먹어버렸다. 

채소를 데치니 양이 줄어들고 그러다 보니 한 번에 먹는 채소의 양이 증가하고 있다.

곧 채소 많이 먹는 돼지가 되어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아니 누가 상추랑 깻잎을 데쳐 먹어?????


제발 제발 제발 믿고 한 번만 먹어주세요. 진심 너무너무 맛있고 향긋하다니까요~

자동으로 밥을 비비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의 식중독은 채소 섭취 습관에 있어서 터닝포인트가 된 게 아닐까 생각하며 즐기고 있다.

늘 같은 방식으로 변함없이 생채소를 즐기긴 했지만, 이제 슬슬 생채소 소화가 부담스러운 중년에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늘 바쁜 생활 때문에 봄 여름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대체로 배달과 가공식품으로 연명하고 있다. 그렇기에 나에게 봄과 여름의 신선 채소의 섭취는 아주 중요한 시기다.


채소는 생이 아니어도 먹을만한 요리가 나온다는 것을 배운 교훈적인 식중독 극복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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