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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Jun 18. 2022

05.전혀 멋있지 않아서 미안합니다.

<드라마 속 디자이너와 다른 현실의 나>


 어릴적 드라마 여주인공들의 직업은 대부분 디자이너였다. 멋지게 차려입고 성공적으로 일해내는 직장생활 모습이 프로페셔널해 보였고 나도 자연스레 디자이너를 동경했다. 고도성장기 90년대 있어보이는 유망 직종은 디자인과 같은 서구적이면서 생소한 분야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니 어른들이 "넌 커서 뭐가 하고 싶니?"라고 물으면 "난 그림 그릴거야~." 그러면 다시 어른들이 화가나 디자이너로 정정해 주었다. "아 그럼 너는 화가(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거구나."

 그렇게 나도 미대입시, 디자인과를 거쳐 자연스럽게 디자이너가 되어 사회로 진출했다.


 디자이너는 멋지게 일을 해내 주변에서 인정 받아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적인 삶이라고 막연하게 그렸었지만, 현실 속의 디자이너는 당연히 그런 일이 없다. 프로젝트가 성공했다고해서 드라마처럼 그 기분을 만끽 하고 박수를 받으며, 승진이나 휴가의 보상까지 받는 일은 흔치않다. 하나의 일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하고 쉴 틈없이 다음 프로젝트에 투입된다. 혹은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를 운영하다보니 그게 성공인지 느낄새 없이 그냥 이어지는 업무들 중 하나일 뿐이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드라마 속 디자이너는 늘 사람과 세상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고, 하는 업무마다 성공하여 인정 받게 된다. 그러나 다르게 이야기 하면 디자이너는 하는 모든 업무는 평가와 구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평가(대부분 부정적인 비평)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면 디자이너가 되는 일은 지옥이 된다.


 연예인들처럼 디자이너의 일에 대한 결과는 언제나 세상에 노출되는 것이다. 늘 누군가에게 평가대상이 되며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한다. 세상의 흐름과 의견을 반영해야하다 보니, 지난달까지 정답이었던 내가 했던 디자인을 이번 달에는 스스로 부인하고 번복하며 리뉴얼을 진행하고, 새로운 제품을 디자인해 내야한다. 

 이렇게 매일, 매달 자가 번복의 시간과 의심을 품고 살다 보니 변덕쟁이에 말바꾸기를 하는 생활에 현타가 오기도한다. 이런 업무에 치여서 겨우겨우 버텨내는 삶이다 보니 어린 시절 내가 생각했던 디자이너가 이런게 맞는지 돌이켜보게 됐다.

 

 그냥 그림이 그리고 싶었는데, 멋있는 옷을 차려입고 높은 고층 빌딩에 들어가는 디자이너가 멋있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지금은 그림을 그리지도 않고, 멋지게 차려입고 높은 고층 빌딩에 들어가지만 왜 멋있지가 않지? 스스로 뿌듯하다는 자부심이 왜 안들까?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은 내 일을 전혀 모르는 타인으로부터 칭찬받을때 밖에 없다.


 학생들이 가끔 나같은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할때마다 뭐라고 진실을 말해줘야할지 난감하긴하다. 내가 드라마 주인공을 동경했듯, 멋진 옷과 고층 빌딩에 들어가는 나를 동경하는 것은 아닌지..

 직장인의 현실이란 아무리 멋지게 포장해봐도 피폐하기만 할 뿐 멋있는 구석이란 하나도 없다. 돈을 번다는 활동과 직업이라는 무게감 아래에서는 감히 멋지기가 쉽지 않다.


ps. 정말 출근이 죽도록 싫었던날,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오늘은 드라마 주인공처럼 생각하면서 출근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주인공에게는 힘든 회사 일은 없다. 그냥 예쁜 옷을 차려입고 사무실에 가서 동료들과 인사하고, 옥상가서 수다떨다 점심을 먹고, 잠시 책상에 앉아있으면 퇴근시간이 온다. 드라마 속의 근무시간은 아주 잠깐이고, 퇴근 후 저녁시간은 무슨 10시간이 넘을 만큼 길게 느껴지는 다양한 개인 일을 한다. 

 그래서 나도 출근 후 '이건 드라마야. 직장생활을 체험하는 역할극이지. 금방 퇴근시간이 올거야.' 라고 최면을 걸고 동료들의 무례한 언행에도 '이건 드라마 대사야.'라며 무심히 넘겨보기도 한다.

 퇴근 후 밥먹고 정신 차리면 잘 시간이지만 '이건 드라마니까 뭐라도 하나 해야 스토리 꼭지가 생기니까.' 라고 생각해 의식적으로 뭘 해보려고 애쓰기도 한다. 현실 속에서 드라마처럼 살려고 하니 더 힘들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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