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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인미D Feb 04. 2021

5. 물욕과 무소유 사이의 줄다리기

<나는 디자이너, 그런데 요기니. 상반되는 나의 아이덴티티>


 평범한 회사원인 나는 직업이 디자이너이다. 어릴때부터 미술을 전공해 미대입시를 준비했고 대학과 대학원에서는 시각디자인을 전공 했다. 직업 특성상 화려한 것을 많이 찾아 보고, 듣고, 사고, 써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환경문제, 동물복지에 관심이 많은데 내 직업은 사람들에게 소비를 부추기고 지구의 환경을 오염시키는 제품 하나 더 만들어내는 상업성 짙은 분야이다. 반면 요가는 아힘사(비폭력) 주의를 중심으로 나와 타인,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오로지 나를 향해 수련하고 다듬어 중간과 조화를 찾는 것이 요기니의 삶이다.


 본캐와 부캐의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나는 요기니이기 앞서 평생 디자이너로 살아왔다. 채식인이지만 고기가 아주 맛있게 요리된 패키지 디자인을 해야한다. 내 점심으로는 샐러드를 먹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육식을 부추기는 맛있게 육즙 좔좔 흐르는 광고 디자인도 해야한다.

 나 혼자 고결한 척하고 타인에게는 다른 길로 안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내 직업현실과 삶의 이상이 구분되지 않을 때도 많다. 늘 마음이 싸우고 맞는지 틀린지 이제 스스로 묻지도 않고 일을 해나간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제품과 브랜드를 사랑해주기 바라는 마음에 디자인을 하는 순간은 진심이다.

 물론 나는 직장인이고 회사가 추구하는 이상을 직업인으로서 프로페셔널하게 풀어내야하는 과업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저 공과 사의 문제이며 직업과 내 인생관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구분할 수는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부분에서도 생긴다.

 나는 특정 럭셔리 브랜드를 사랑한다. 물론 윤리적, 지속가능한 생산을 위해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은 예전처럼 리얼퍼나 비윤리적인 소재를 지양하고 지속가능한 생산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지구 환경적인 관점에 있어서는 그런 소비 조차 지양해야한다. 물론 저품질의 제품을 매번 사는 것보다 좋은 제품 하나를 사서 평생 쓰는 것은 꽤 괜찮은 소비라며 스스로 위안하고 있지만.


 내게 모순이 있음을 조심스럽게 인정한다. 환경과 동물 보호에 기부를 하고 피켓 시위도 하지만 나는 쇼핑도 하고 육식에 관련된 직업 활동도 하고 있다.

 나는 모순을, 내 생각의 격차를, 이상과 현실의 갭을 줄여나가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은 가지고 싶고, 내 꿈을 실현시키는 직업도 지켜야하고,  요기니로서의 삶 안에서 중간과 조화를 향하는 수련도 열심히 해 나가고 싶은 평범한 사회인이다.


 이런 모순에 대해 타인들이 삿대질 하며 비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변화는 내가 완벽, 고결 할 때가 아니라 내 삶의 모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육식의 철폐가 아니라 스스로가 의식을 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의식적으로 육식을 피하는 선택적인 실천을 말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육식을 끊기 어려운 것을 안다. (저도 잘 알아요.) 그렇기에 그들은 채식을 하고 싶긴 하지만 '난 불가능해.' 라고 하며 시작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빈틈없이 완벽한 채식의 실천이 아니라도 일주일에 한번 정도 육식 안 먹는날 MEAT-Free Monday를 실천해 볼 수 있다. 일주일에 한번 선택적으로 채식주의자가 되어 보는 것이다. 그것이 플렉시테리안이다. 사람들에게 이런 플렉시테리안 같은 쉬운 실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 다들 너무 좋아한다. 털 한끝도 실수하지 않겠다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쉬운 작은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채식이냐 라며 모순덩어리라고 욕하며 그럴 바에야 아무것도 하지말라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비판적이며 본질을 흐리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은근 많기는 하다. 거기에 흔들리지 말고 내 기준, 내 철학에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하면 되는 것이다. 완벽치 못하면 시작도 말라고 엄포를 놓는 사람은 결국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자기 변명이자 위안으로 하는 공격적인 태도이다. 어차피 육식을 근절하기 힘드니까 그냥 편한대로 살자고 하는 사람은 이 세상 변화의 희망을 싹조차 잘라 버리고 하향평준화 하고 싶은 불만쟁이일 뿐이다.


 모든 시작은 그렇게 작은 변화로부터 이루어진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서 보면 타인에 대한 도움은 아주 작은 한가지로 시작되었다. 주인공이 3명에게 도움을 베풀고 그들은 받은이에게 되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3명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다단계처럼 작은 도움 하나로 세상을 점점 아름답게 바꿔갈 수 있다는 플롯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나의 채식 라이프도 처음에는 고기가 먹고 싶을때 한번 정도는 안 먹기를 하다가 점점 그 주기가 짧아져서 결국은 폴로채식으로 올 수 있었다. 폴로를 거쳐 페스코, 페스코를 거쳐 락토오보, 그리고 비건까지 멀리 생각하면 채식을 시작할 수도 없다. 하지만 시작은 아주 쉽고 작은 실천을 하나씩 추가하며 도전해 보는 것이다. 한달에 한번 육식 멀리하기, 주 단위로 도전하기, 이것이 익숙해지면 외식 이외에 집에서 먹는 식사는 모두 채식으로 하기, 이렇게 점점 바운더리를 좁혀가다보면 어렵지 않게 채식을 향해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조금씩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해나가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도달해 있는 경우는 아주 많다. 완성된 모습의 목표가 너무 막연하다면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을 스스로 선택해서 하면 된다. 하다 못해 오늘 점심으로 먹을 샐러드는 고기가 없는 쉬림프 샐러드나 그린샐러드를 선택하는 것으로도 한 걸음 실천을 향해 나갔다고 생각한다.


 먼 미래에 오늘을 돌아보면, 지금했던 작은 행동과 선택이 나를 얼마나 크게 바꾸어 왔는지 알수 있을 것이다.

굳이 채식주의자를 향해 못가도 어떠한가. 그냥 나는 육식을 조금 줄이고 채식을 지향하는 삶을 살고 있다라는 의식으로 내가 가능할때만 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전혀 채식에 대한 의식을 안하는 것 보다 위대한 일상생활의 작은 실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채식주의자 라는 말보다 채식지향인, 채식인이라는 말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채식을 도전해보게 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완벽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하지마라가 아니라 '할 수 있는게 하나라도 있다면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조금씩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실천한 것이 십시일반으로 모일 때 세상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완벽한 한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지만 한 가지씩 실천하는 수백명의 사람이 모여 세상이 바뀔 수 있다.

 모순 속에서 그렇게 나도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것을 하나 실천해 보며 살고 있다. 그렇게 하다보면 이상과 현실의 갭이 언젠가는 무척 가까워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서로 떨어져 있으면 한 방울에 불과 하지만 함께 모이면 우리는 바다가 된다."

-류노스케 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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