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던 이가 빠졌다

by 김블리

매복사랑니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입속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이빨 정도로만 생각했다. 마치 수줍은 아이가 어머니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처럼, 잇몸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빨. 그런데 이 녀석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삼십대에는 그저 하루 이틀 볼이 부었다가 가라앉곤 했다. 치과 검진을 받을 때마다 의사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굳이 안 뽑아도 됩니다. 신경이랑 너무 가까워서 문제가 생기면 그때 뽑으세요." 그래서 나는 안일하게 생각했다.


아직은 괜찮다고, 언젠가는 저절로 해결될 거라고.


하지만 세월은 잔인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몸의 회복력은 떨어지고, 그동안 참아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일주일이 넘도록 매복된 사랑니가 퉁퉁 부어서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점 심해져 편도선까지 붓기 시작했다.


참다못해 치과를 검색했다. 매복사랑니는 아무 치과나 가서는 안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름의 검색 노하우를 발휘했다.


1. 구강악안면외과 전문의가 있는 곳 (필수)

2. 네이버 영수증 후기에서 '친절하다'는 말보다는 '과잉진료가 없다'는 후기가 여러 개 보이는 곳 (필수)


3. 3D CT 촬영이 가능한 최신 설비를 갖춘 곳 (선택사항)

4. 그나마 가까운 곳 (선택사항)



서너군데 찾은 후, 그중에서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한 곳을 예약했다.


치과에 가니 엑스레이를 찍은 후,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3D CT를 찍어야 한다고 했다. 화면에 나타난 내 턱뼈와 신경, 그리고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어있는 사랑니의 모습은 마치 지뢰밭에 묻혀있는 폭탄 같았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8일 오후 08_38_19.png


의사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사랑니를 뽑은 후에 신경에 이상이 생겨 입술이나 턱에 마비가 올 수도 있습니다."


각오했던 바였다. 그럼에도 나는 뽑아버리고 싶었다. 내 소중한 신경을 내어주고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사랑니를 뽑아버리고 싶었다.그렇게 나는 당일 발치를 결심했다.


막상 발치는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마취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처음에는 '그냥 뽑으면 되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막상 의자에 누워서 마취를 해도 감각이 그대로 느껴지니 손발이 덜덜 떨렸다. 긴 마취 바늘을 세네 개나 꽂을 때까지는 그렇게 무섭지 않았는데, 마취가 제대로 안 되니까 공포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추가 마취 후에는 완전히 감각이 사라졌고, 정작 매복된 사랑니를 뽑는 건 정말 1분도 안 걸렸다. 신기하게도 발치 직후에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 약 처방을 받고 집에 올 때까지만 해도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했다.


마취가 풀리지 않아 입술이랑 턱이 꽤 오랜 시간 얼얼해서 점점 걱정이 됐다. '정말 이대로 마비 되는 건 아니겠지...' 소중한 신경 내어주고서라도 상관없다고 다짐했던 몇시간 전이 무색하게도 엄청난 걱정을 했다.


하지만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니 뽑은 곳이 미친 듯이 아파왔다. 그제서야 급히 처방받은 진통제를 먹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얼얼했던 입술과 턱의 감각도 돌아왔다.


지금 아직 회복하는 중이지만, 정말... 상쾌하달까.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이를 아무런 후유증 없이 무사히 뽑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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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던 이가 빠졌다'는 말이 진짜 이런 느낌이구나 싶다.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불안감도 함께 사라진 것 같다. 언젠가는 뽑아야 할 거라고 알고 있었지만 계속 미뤄왔던 일을 드디어 해결했다는 후련함. 이제는 음식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더 이상 그 녀석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책상 위에 놓인 약봉지를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든다. 항생제, 소염제, 진통제가 아직 며칠치 남아있다. 이 하얀 알약들은 마치 내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작은 증인들 같다.


약을 먹을 때마다 '아, 아직 아픈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곧 나을 사람이기도 하고' 하는 희망도 함께 온다. 이 약들이 다 떨어질 때쯤이면 나는 정말로 완전히 회복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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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