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영구 Jul 10. 2020

꿈 속 산책

웹진 취향껏 8호 <BLACK>

사진출처: 넷플릭스 페르소나 <밤을 걷다>      



페르소나라는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두 남녀의 뒷모습이 나타나고, 한적한 골목길을 걷는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가 조금 이상하다. 언니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여자를 보며, 남자는 묻는다. 왜 이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해? 그러자 여자가 대답한다.



그거야, 내가 죽었으니까. 잊었어?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만나는 이곳은 남자의 꿈속이다. 흑백의 화면 속에서 두 남녀는 쭉 걷는다. 온 밤을 내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담담하게. 만약 흑백 꿈속에서 딱 한 사람과 산책을 할 수 있다면 꼭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정 정자 재자, 이름마저 너무 그리운, 할머니를 만나고 싶다. 당신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았다. 꼭 다 전하고 싶다.     








할머니. 손주가 열댓 명이나 되는데 왜 나를 제일 예뻐했어? 나는 늘 궁금했어. 우리는 20 여년을 한집에서 살았잖아. 나는 좋은 기억들이 참 많이 남아있어. 손을 잡고 교회를 다닌 것, 손이 커서 늘 큰 그릇에 음식을 해주던 것, 간식으로 닭발이랑 돼지 껍데기 같은 걸 해줬던 것. 덕분에 나는 가리는 음식이 없잖아. 그래서 여기저기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있지. 당신이랑만 먹을 수 있던 김국이나, 돼지고기 무침 같은 게 가끔 생각나.   


   



할머니. 당신이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 말이야. 머리를 빡빡 밀고 뇌에 찬 피를 빼고 있었던 그때 말이야. “나 왔어.”라고 이야기하면서 딱 알았어, 내가 너무 늦었다는 걸. 나이가 나이인지라 몇 번이나 병원 신세를 지던 당신이 이번에는 정말로 떠날 거라는 걸. 참 신기하지. 사람들은 그런 걸 어떻게 알게 될까 했는데, 정말 그냥 알게 되더라고. 손이 벌벌 떨렸어. 비닐장갑을 낀 손을 뒤로 해서 깍지를 꼈는데 온몸이 떨렸어.





할머니. 그거 알아? 솔직히 당신을 미워했어. 한 번은 기숙사에서 엉엉, 진짜 세상이 떠나가라 운 적이 있었거든. 당신이 집을 나간다는 소식 때문이었어. 엄마도 아빠도 이해가 됐는데, 당신에게는 화가 났어. 어디가 얼마나 아팠든지 당신만큼은 나를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었지.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해. 당신이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당신이 지금도 나랑 함께일지도 모른다는. 쓰러진 당신을 내가 제일 먼저 발견해서 병원으로 옮겼을 테니까. 뭐 그런 실없는 가정을 해보곤 했어. 사실 돌아보면 그래. 그냥 미워할 대상이 필요했었나 봐. 가장 사랑했으니, 가장 편안하게 미워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몰라.      





할머니. 왜 이렇게 서둘러서 떠났어? 내가 딱 취업을 했던 때였잖아. 첫 월급으로 당신 생일에 용돈을 주려고 했어. 이거라도 받고 가지. 이제 막, 당신에게 무엇이든 해줄 수 있던 때였는데. 당신을 원망하며 보냈던 시간이 너무 아깝더라. 우리한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던 것도 모르고. 나 참 철없다 그치. 아 그래도 나 사회생활은 조금 잘하는 것 같아. 다들 나보고 또래보다 어른스럽대. 그래서 내가 할머니랑 자라서 잘 자랐다고 대답했어. 나 잘했어? 아빠가 당신 사진을 가져와서 문 뒤에 숨겨뒀거든. 근데 얼마 전에 보니까 벽에다가 예쁘게 잘 걸었더라. 나는 그 방엔 잘 안 들어가지만, 가끔 보고 생각했어. 사람은 나이가 들면 얼굴에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는데, 당신 참 곱다고. 참 다정하게 생겼다고 생각했어.      





할머니. 지난번엔 이런 이야기도 들었어. 당신이 나를 위해 쌓아둔 기도가 참 많은 것 같대. 내가 참 예쁘게 잘 자랐다는 거야. 당신 얘기를 하면서 울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무색하게도 펑펑 울고 말았어. 맨날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만나지? 싶을 정도로 내가 인복이 좋잖아. 근데 생각해보니까 그럴 만 하더라.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당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당신이 나를 위해서 했던 기도의 양이 어마어마하잖아. 늘 바르고 어여쁘게 자라라고 울며 기도했잖아. 바스러져가는 당신의 삶은 거들떠보지도 않고선. 덕분에 나는 늘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줘. 당신을 위해서라도 더 단단하고 바른 사람으로 자라려고 늘 다짐해. 내 평생의 기둥. 당신이 떠나고 나서야 배우는 게 더 많은 것 같아 부끄럽네.     





얼마 전엔 당신의 기일이 있었어. 내가 써준 편지는 잘 읽었어? 내가 보낸 인사는 잘 받았어?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어?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혹시 나처럼, 당신도 나를 미워했던 적이 있어? 엄마가 장례식에 못 올까 봐 엄마 손을 잡고 떠났어? 할머니. 왜 나를 그렇게 사랑했어. 왜 그렇게 빨리 가야 했어. 왜 나를 버리고 떠났어. 왜 내 꿈에는 안 나와. 왜 내 원망을 다 안고, 그렇게 다 품고 갔어. 너무너무 궁금한 게 많아. 어차피 이제는 전해줄 수가 없겠지만.      










사는 건 '잘 헤어지는 방법'을 배우는 일이다. 떠난 이를 원망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하면서 울지 않는 것을 배우는 일. 할머니가 떠난 지 1년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할머니와 헤어지는 중인 것 같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지만, 저 말들은 모두 삼켜내기로 한다.


만약 꿈속에서 할머니와 산책을 할 수 있다면, 나는 그저 손을 잡고 걷기로 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없이 긴 밤을 걷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저렇게나 많지만 모두 넣어두고 눈인사를 건네려고 한다. 잘 키워줘서 너무 고맙다고, 많이 보고 싶다고.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했다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웹진 취향껏에서 발행된 글입니다.

https://www.chwihyangkkeot.com/writing8_c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아지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