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취향껏 13호 <reset>
<이 해의 초입에서 보냅니다>
과한 슬픔을 겪고,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살아온 날들이 늘 그러했듯,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글을 썼습니다. 100여 편이 넘는 글을 쓸 동안 나를 지옥 끝까지 몰아냈던 사람들과, 나를 사랑으로 지켜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영아, 너는 인복이 참 많아. 엄마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들을 떠올립니다. 인생의 빈 곳을 채워주는 소중한 사람들 덕분에 견디고 있습니다. 나의 삶의 팔 할은 당신들의 몫이었지요. 당신들에게 보답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한 가지 더 작은 바람을 보태자면, 나를 위해 꽃 한 송이 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2020.01.01.
<잘 흘러가고 있습니까?>
바쁘게 하루를 보냈던 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도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시끌벅적하게 지내기도, 숨을 죽인 채 하루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도움이 되었고,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냥, 어떻게든 굴러갔던 것 같습니다. 울퉁불퉁,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처럼 온통 휘둘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혼자 있지도 말고, 떠들썩하게 모여 있지도 말고 같이 있자. 가끔 사랑 때문에 울컥하는 날이면 부끄럽기도 합니다. 내가 무어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아껴주는 건지. 나만 모르는 인생의 족보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저런 따뜻한 말을 건네줄 수 있을까요.
2020.04.02
<악몽을 꾸는 날들이 늘었습니다>
요즘 자꾸 잠을 설칩니다. 오늘은 악몽을 꿨습니다. 빌린 적도 없는데, 대출 이자처럼 늘어나는 악몽이 무섭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사치일까요? 온전히 믿지도 못하면서 내려놓지도 못하는 마음들이 무겁습니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슬며시 고개를 듭니다. 최선을 다해 덜 상처 받을 궁리를 해봅니다. 나는 여전히 연약합니다. 그렇지만 조금은 맷집이 세진 걸까요? 무사히 견디고 있습니다. 악몽을 꾸더라도 자는 것처럼, 다치면서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무사히 통과하기를 바랍니다. 이 끔찍하고 아름다운 나날들을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날이 오겠지요? 이 시절은 그리 길지 않기를 기도하며, 오늘도 묵묵히 웅크렸습니다.
2020.07.03.
<행복하다는 말, 너무 오랜만이라>
사람이 만지고, 느끼고, 돌아다니고, 보고, 경험한 기억들은 다 몸에 새겨집니다. 나이테가 생기는 것이지요. 몸과 마음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 몸과 마음처럼 행복과 불행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행복 뒤에는 끝말잇기처럼 불행이 자주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덜 행복하고 덜 불행하고 싶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삼켰습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크게 아픈 날이면 목이 퉁퉁 부어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당신들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당신들로 인해 변하는 내가 마음에 듭니다. 내가 싫어서 울던 날들이 자꾸 아득해져서, 이렇게 풀어져도 되는지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용기를 내서 행복하다고 말해보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나를 따라오던 불행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지금처럼만, 잘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2020.10.25.
<짝사랑.(이라고 쓰고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적어도 나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짝사랑을 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써야 하기 때문에 쓴 날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영영 돌아봐주지 않을 사람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는 일. 어쩐지 절박하고, 포기하기에는 멀리 와버린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글을 온 마음을 담아 유서처럼 적었습니다. 누군가의 불행을 기도했다가, 그럼에도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나만 이해할 수 있는 그 마음들이 나를 참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2020년을 관통한 ‘코로나’라는 이 경이로운 질병을 통해서 당연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손쉽게 부서지는 걸 보았습니다. 세상에 당연한 것이 없다는 것을, 왜 경험해야만 알 수 있을까요. 어쩐지 씁쓸했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랑은 전달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돌이켜보니 오직 사랑만이 구원임을 절실히 느끼는 해였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아픔은 여전하고, 흉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미운 이름들이 떠오르고, 가끔 벗어나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지긋지긋한 말꼬리들이 따라붙을 때마다 무너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너무 나의 불행에 온 힘을 다하지 않고 싶습니다. 최은영 작가가 말하기를 사람은 희미한 빛으로도 앞을 향해 나아가는 힘을 가졌다고 합니다. 나의 삶에서 나를 구원하는 것도, 이 지구에서 우리가 버티는 힘도 희미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믿습니다. 나는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2020년에 끝에서, 드디어 이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어볼까 합니다. 한풀이하듯 살았던 이 해를 보내주려고 합니다. 나는 이제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힘이 되기에 쓰는 사람이고자 합니다. 주저앉아있던 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닙니다만, 다시 걷지 않겠다고 떼를 쓴 건 조금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시 글을 쓰겠습니다. 잘 살아보겠습니다.
2020.12.31
웹진 취향껏에서 발행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