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5일장, 장이 서지 않은 날이어서 시장터 뒤에 산수유가 곱게 피었길래 내려갔다가 강아지를 찾는 전단지를 보았다. 마치 우리 집‘해피’ 같아서 한동안 보고 있다가 애타게 찾는 주인과 강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녀석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나를 사랑한 해피 이야기
'해피’라는 개의 이름은 나름대로 전통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에 온 개는 무조건 해피였다. 행복한 강아지라는 뜻인지 혹은 집에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뜻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난 후에도 우리 집 강아지는 해피로 지었다.
이웃마을에서 가져온 작고 귀여웠던 강아지 해피는 무럭무럭 잘 자랐는데 어찌나 사람을 좋아하던지 손님을 매번 따라나선다는 것이다. 차가 빈번한 도로 가까이에 있어서 우린 해피를 묶어 기르기로 했다. 그리고 녀석은 새끼를 낳고 나서야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다.
해피는 목줄을 풀어주는 순간 내 눈앞에서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모성을 믿지만 다치지 않을까,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영영 달아나는 건 아닐까... 나는 오랫동안 서서 해피를 기다려야 했다. 얼마나 지나서 녀석은 온몸에 도깨비바늘을 잔뜩 붙이고 흙으로 떡칠이 되어서는 헐떡이며 새끼에게 달려갔다. ‘그래, 모성이란 참 대단한 거야.’ 나는 적이 안심이 되었었다.
그 시절 우리 집은 한우를 키웠는데 아이들 학교 문제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해야만 했기에 그 집에 들어올 사람에게 해피를 부탁하고 녀석을 쓰다듬으며 달래듯 말을 해줬다. “해피야 미안해. 소들이 여기 있으니 날마다 너를 보러 올 거야. 축사에 쥐들이 많아서 너는 이곳에 있어야만 해~!! 서운해하지 마라. 알았지?!” 그리고 무심하게도 나는 해피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이삿짐 정리를 했고 할 일도 많았고 개는 집을 지키는 동물로만 생각을 했었으니까... 그러다 바뀐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가 이사를 간 후로 녀석은 짚더미 속에서 밥을 굶으며 절대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다가갈라치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려서 데려갔으면 한다는 전화였다. ‘그랬었구나...’ 나는 득달같이 달려가서 열흘만에 녀석을 품에 안았는데 그새 해피의 몸은 거칠고 앙상해져 있었다.
이사한 집은 연립주택처럼 나란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은 우리 가족이 옆집에 놀러 갔다가 나오면 신발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해피가 우리의 신발을 물어다가 현관 앞에 가져다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피는 가족이 되어갔으며 우리를 많이도 기쁘게 했다. 그 집의 뒷 배경은 얕은 병풍처럼 빙 둘러쳐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크고 작은 구멍들이 많았다. 큰 구멍 속을 들여다보면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가 하면 아이 주먹만 한 작은 구멍도 많아서 해피와 아이들에게 보물창고가 되어주기도 했다.
어느 날 해피가 보이지 않았다. 배가 남산만 하게 불러서 녀석의 보금자리를 살펴주었지만 녀석은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해피~ 해~~ 피야~~!!” 목청껏 불렀지만 해피를 찾을 수 없었는데 내가 신던 운동화도 보이질 않았다. 어쩌면 굴속에 새끼를 낳았을 것도 같아서 우리는 굴 탐색을 시작했고 강아지들 울음소리를 따라 가보니 손에 닿을 듯 말 듯 한 깊이에 해피는 내 운동화로 굴을 막아놓았다. 나는 그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떻게 녀석을 사랑해 줘야 하나, 미련하게도 사람이 동물보다도 사랑하는 방식이 이렇게나 서툴다니...
그 후로 해피는 세 번 더 출산을 했고 새끼를 낳을 때가 되면 그때마다 내 신발을 물어다가 굴 입구에 수호신처럼 막아놓았다. 새끼들이 커감에 따라 자연히 신발은 밀려 나왔고 물론 그 신발들은 사용할 수 없었다.
해피는 다섯 번째 새끼를 가진 몸으로 2004년 12월 20일, 우리 곁을 영영 떠나버렸다. 그것이내 잘못이기도 했으므로 더 아팠다. "사랑하는 해피, 미안하다. 미안하다. 잘 가라~!다음 생에는 꼭 인간으로 태어나길 바라." 나는 해피의 죽음을 통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