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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원 Sep 18. 2015

아, 할아버지

벌초하기 좋은 날


오빠는 술을 올리고 절을 한 다음 담배 한 개비를 태워 무덤 위에 놓는다. 옆 산소의 가족은 무척이나 부지런한 이인지 마른풀 내음이 향긋하다. 예취기 돌아가는 소리가 정겹고 가을 햇살이 따가워 오빠의 얼굴은 연신 땀이 흐른다. 

"오빠, 보면 안 될까?" 

"뭘?" 

"할아버지 보고 싶어" 

"보지 마" 

"보고 싶은데?"

"여자들은 안 보는 게 좋아" 

"그래도... 안 무서워, 볼 거야!" 

"........." 

몇 년 전 외할아버지 묘를 이장하던 날, 벌써 40여 년이 흘렀고 항상 마음에 담았던 할아버지였기에, 또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할아버지를 뵙고 싶었는데 오빠는 말없음으로 보는 것을 말렸다. 그래도 어머니가 말씀하실 때는 아무 말없이 참관하시게 했다. 


내가 세 살 되던 해에 한강변 가까이에 있던 집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불이 났고 집을 다시 지으려 부모님은 우리 형제들을 외갓집에 맡겼단다. 외할머니께선 ‘적적하다.’ 시며 셋째인 나를 키워주겠다 하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유년을 두 분과 함께 보내게 된다. 


옛날에는 난방을 땔감으로 사용했던 터라 가을이 오면 사람들은 땔감을 산에서 구했는데, 외할아버지가 땔나무를 하러 산에 가시는 날에는 손녀인 나를 항상 바지게 위에 올려 놓아주셨다. 흔들거리는 지게 위에 돌아 앉으면 황금빛 들녘과 길가의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게 얼마나 좋았던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시며 간간이 지게 위의 손녀를 확인하시는 할아버지. "맹희야~ 오늘은 학교에서 뭣을 배왔냐? 인자는 틀린 글자는 읎것제~? 선상님이 우리맹희 예뻐 허시 지야?!" "응~ 하나씨, 오늘은 숙자랑 땅따먹기 했는데 내 땅이 제일 컸다~!" "그랴~ 우리 맹희 밥도 잘 묵고 공부도 열심히 혀야 쓴다이~?!" 

산에 다다르면 할아버지는 맹감, 아그배, 도토리, 상수리 그리고 알지 못할 열매들을 먼저 낫으로 베어 주시고는 땔나무를 하셨는데 할아버지가 일하시는 동안 나는 열매들을 따서 쇠곽에 담으며 놀다가 또 가끔은 마른풀 냄새를 맡으며 잠들기도 했었다. 할아버지가 지게 가득 땔나무를 싣고 일어나시면 내 쇠곽에도 열매가 가득했다. 할아버지 앞서 잰걸음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누렁이가 달려 나오던 그 가을날이 나는 늘 그립다. 


붉게 타오르던 진달래꽃과 삐비, 가물었던 논에서 사람의 발자국 속에 모여들던 올챙이와 톡~톡 튀어 달아나던 메뚜기들과 추수 끝난 논에서 동그랗게 뚫린 구멍 속 손끝에서 느껴지던 우렁이의 감촉, 뉘엿뉘엿 해 질 녘 물 위로 튀어 오르던 물고기 떼, 자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강가에서 잡았던 다슬기와 개앙 조개들, 어둠이 내리기 전 자욱하게 깔리던 밥 짓는 연기와 솥뚜껑을 열면 후욱~끼치던 밥 냄새. 밥 위에 올려놓아 같이 쪄진 조기찌개의 맛, 어디 그것뿐이랴... 


12살이 되던 해에 나는 그만 두 분의 곁을 떠나는 날은 왔고, 커다란 산 같았던 할아버지의  뒤돌아 선 몸이 떨리시던 것을... 떠나는 기차역에서 손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계시던 두 분의 영상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내 사랑의 원천이셨던 외할머니와 할아버지... 저물어 가는 들판에서 어느 길모퉁이에서 그리고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에서 나는 두 분을 그린다. 유년의 기억들은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늘 행복감으로 남아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 조건 없이 주신 그 사랑이 자양분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기를... 


"아쉬워...." "뭘?" 

"할아버지 뵐 수 있었는데..." 

"에비~! 할아버지가  놀라게 하시면 어쩔래?" 

오빠는 눈을 크게 뜨고 놀렸는데, 땀 젖은 얼굴이 나는 좋기만 하다. 오늘은 벌초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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