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 같은 세계여행길
내게 명함과 직책이 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지난 세월이 모조리 까마득한 시간을 산다.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떠나와 있다는 것도 전부 현실이 아닌. 그저 며칠의 휴가를 즐기는 중인 것도 같고 내일 당장 돌아가야 할 것 같기도 하고.
한국을 떠난 지 120일이 지나고 있다. 오랜만에 메신저에서 안부를 묻던 친구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끝을 알 수 없는 여행을 떠난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답했다. '매주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 같아.' 일주일 단위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살아내며 나라마다 새로운 삶이 주어지는 나의 날들. 끝을 아는 시한부의 삶.
어느 날은 겨울이 어느 날은 여름이 그리워지기도 싫어지기도 한다. 비가 미웠다가 햇살이 싫었다가 배낭 하나에 담기는 내 인생이 작아 보이기도 하고 욕심과 열정을 둘러업은 내가 여전히 괴롭기도 하고. 월화수목금요일이 무탈하게 반복되어 돌아오는 일상에, 여러 번 감사를 되뇌기도 했다.
여행이 시작된 후로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 주어진 기분만 생각하며 산다. 지나온 길을 후회하거나 곱씹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모든 날들이 우리에게 충만했고 모든 시간이 나에게 충분했다. 머무는 나라마다 저마다의 색과 공기가 있어 그 온기를 온몸으로 느끼려 애를 쓴다. 걷고 보고 걷고 웃다가 또 걷는다. 어쩌면 다시는 올 수없는 만날 수 없는 마지막 시간이 흘러가고 있으므로.
무계획 가운데 어쩌다 들린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비가 내리는 마을 어귀를 어슬렁거리다가 불평과 불만이 사라진 나를 발견했다. 비가 오면 머물고 해가 나면 일어서는, 묵직한 짐을 짊어지는 걸음에 원망도 후회도 남아있지 않은 날을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태생부터 넘치는 욕심은 언제쯤에나 거둬가실는지 이 못난 자존심을 치켜세우는 우둔함은 언제나 사라져 버릴까 싶었는데 대륙을 넘고 바다를 건너는 동안 그 어느 길가에 사뿐히 내려두고 온 모양이다. 떠나지 않으면 버리지 못했을, 떠나오니 자연스레 잃어지는 내 다 버리고 싶던 것들.
이름도 촉촉한 남프랑스 생폴 드 방스 새하얀 물안개 아래 이름도 없는 어느 카페에 앉아 내일의 행복만 꼽아본다. 앞날은 알 수 없으나 오늘이 생의 마지막 날 일지도 모른다는 것쯤은 이제 잘 안다.
2018 10_ 프랑스 남부 동화 같은 마을 생 폴드 방스의 비 내리는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