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결혼문화 차이를 처음 겪은 나이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토요일 오후, 차창 밖으로 늦가을 햇살이 따스하게 흘렀다. 예비신랑과 나는 오늘도 설렘과 피곤함으로 결혼 준비를 위해 차를 몰고 있었다. 체크리스트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우리의 오후는 언제나처럼 바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엄마의 목소리였다.
“은행 가서 만원짜리 신권을 바꾸려고 하는데, 우리 집은 오십 장이면 되겠지? 예비신랑 쪽도 몇 장 필요한지 물어봐.”
나는 옆자리를 향해 물었다.
"신권 준비했어? 엄마가 같이 바꿔주신다는데 몇 장 필요해?"
핸들을 잡은 채 그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뭐야?"
"응? 결혼식 날 흰 봉투에 넣어 드리는 거. 신권으로 준비하는 만원권 말이야."
"... 그게 뭔데?"
그의 얼굴은 정말, 진심으로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걸 모른다고?'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결혼식장에 간 지 오래되어 잊은걸가? 머릿속으로 이유를 찾고 있을 때, 그가 다시 말했다.
"아! 그래, 경상도에서는 주더라. 뭔지 알 것 같아. 근데 우리는 그런 거 없어. 준비 안 해도 돼."
'우린 안 해도 돼?'
그 한마디가 공기 중에 오래 떠 있었다.
그때, 우리의 결혼은 단순히 마흔의 남녀가 하나 되는 일 이상임을 체감했다.
두 집안의 뿌리가 교차함과 동시에 서울의 바쁜 리듬과 경상도의 듬직한 토양이 부딪히는 첫 번째 여울이었다.
마흔까지 친구들의 청첩장 한 장이 도착할 때마다 나는 그 안의 사진을 보며 상상했다. 하얀 드레스, 꽃들이 가득한 홀, 그리고 웃음소리로 가득 찬 테이블. 수많은 결혼식에 초대받고, 때로는 친하지 않은 지인의 결혼식까지 축의금 부담을 안고 참석하며 나는 무의식 중에 결혼 문화의 지도를 그렸다.
결혼식장은 주로 부산이었고, 울산, 창원, 진주, 멀게는 포항이었다.
가장 먼 서울은 가족 대표만 참석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서울 출신의 그와 결혼준비를 하면서 그 지도가 의문으로 바꼈다.
서울과 부산의 결혼식 문화 차이는 거리만큼이나 멀었고 그중 상당수는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과 정반대였다.
요즘은 점점 하객이 많은 쪽으로 결혼식장을 정하는 추세지만, 부산에서는 여자 집 근처나 신부 쪽에서 예식장을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것이 내 숙제라 생각하며 우리 집 근처로 예식장을 예약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에서는 상황이 다를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청첩장을 돌리던 날, 예비신랑의 친구 부부를 만났다.
반갑게 청첩장을 펼치며 우리에게 자연스레 물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결혼식장은 어디예요?"
"저희 집이 있는 부산의 고속도로 출구 근처예요."
부산지역 내의 위치를 묻는 줄 알고 내가 대답하자, 그들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요? 서울에서는 남자 집 근처로 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요?"
예비신랑 친구의 물음에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밀려왔다. 놀라움과 고마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결례를 범한 것 같아 놀랐고, 아무 말 없이 자연스럽게 부산으로 정해준 그에게 고마웠다. 그에게도 분명 익숙한 방식이 있었을 텐데.
내게는 신부 집 근처가 당연했는데 서울에서는 신랑 집 근처가 당연했다니.
같은 나라, KTX로 2시간 반 거리에 불과한 두 도시가 이토록 다른 '당연함'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들은 많았다.
상견례 장소는 어디로 하고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하객을 태울 버스와 음식은 어느 쪽에서 준비하는가. 결혼식장 답례품을 건네는 방식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하나가 서울과 부산의 방식이 달랐다.
서로의 상식을 조심스럽게 맞춰보며 탐색을 해야 하는 부분들이었다.
내가 '당연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그에게는 낯설었고 그가 '원래'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내게는 의아한 것이다.
마흔 해 동안 당연하다고 믿어온 것들이 사실은 내 세계 안에서만 통용되는 작은 규칙이었다는 깨달음. 그것은 때때로 흥미로우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다행인 것은 결혼준비를 하며 우리가 대화를 많이 나눴다는 점이다. 파워 J 커플이라 하나씩 얘기해 확인하고, 조율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문화차이의 많은 부분은 결혼식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기도 했다. 그만큼 서로 꼭 고집하는 부분은 없었다. 상견례 장소를 시부모님의 배려로 부산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하지만 모든 것을 미리 알 수는 없었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위쪽에서는 버스대절 문화가 다르다더라. 초대하는 쪽에서 음식이랑 비용을 준비한다고 하네?"
어디서 들으신 건지, 엄마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 나는 급히 예비신랑에게 물었다. 그런데 시부모님은 한사코 이미 버스 대절 비용을 지불했으니 안 주셔도 된다고 사양하셨다.
그 말을 들은 우리 집은 부랴부랴 움직였다.
떡, 고기, 과일을 비롯해서 결혼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며 드실 음식들을 각각 가장 좋다는 곳에서 정성스럽게 준비하셨다. 다행히 시부모님은 아주 맛있었고 푸짐했다며 만족해하셨다.
그리고 흰 봉투 문화.
부산에서는 결혼식에 참석했지만 식사를 하지 못하고 가셔야 하는 경우, 하얀 봉투에 신권 만 원을 넣어 드리는 문화가 있다. 와주셔서 고맙다는 마음의 표시이자 정(情)의 상징이었다. 혹은 봉투대신에 답례품을 준비해 드리기도 한다.
하지만 서울에는 이런 문화가 없고 생소했다.
그래서 우리는 각각 서로의 집안 문화에 맞춰 준비했다. 나는 부산식으로, 그는 서울식으로. 같은 식장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것이 틀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지 달랐을 뿐이었다.
마흔이라는 나이에 서로 다른 도시에서 자란 두 사람에게 결혼 준비는 단순한 통과의례가 아니었다.
서울과 부산의 방식이 다름을 알게 될 때마다 우리는 작은 협상을 반복하며 서로의 상식을 배워나갔다.
익숙한 것들을 조금씩 내려놓고 당연함을 조심스레 풀어내며 그렇게 우리만의 새로운 규칙과 리듬을 만들어갔다.
결혼은 사랑과 약속의 결합이지만, 동시에 두 집안과 두 도시가 만나 써 내려가는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당연하다’ 믿어온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좁은 세계의 규칙이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비로소 상대의 세계가 선명히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흰 봉투 하나, 상견례 장소 하나, 예식장 위치 하나. 그 작은 차이들이 모여 우리는 조금씩 배워갔다.
결혼식은 두 집안이 딱 맞아떨어지는 완벽한 조화가 아니라, 서로 다른 음들이 천천히 어울리며 만들어내는 불완전하지만 아름다운 화음이었다.
배려와 이해가 그 사이를 채워줄 때, 비로소 결혼은 ‘둘의 이야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