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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결혼식, 후회된 두 가지

마흔, 결혼식 D-day

by 아테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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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글 <결혼식 3일 전, 웨딩 스냅 작가가 사라졌다>의 여파로, 나는 인터넷 뉴스를 뒤지고 커뮤니티에서 신고를 접수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분노와 허탈함 사이 어딘가에 떠 있는 마음으로 신혼여행을 위한 네일 예약에 맞춰 네일숍 의자에 앉았다.


손끝에는 웨딩드레스의 비즈와 어울리도록 잔잔한 펄과 진주를 누드톤 위에 올렸고,

발끝에는 휴양지 모래사장을 상상하며 연한 핑크톤에 큼지막한 장식을 엄지에 얹었다.

네일을 하고 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안 좋은 일들은 잠시 잊고, 마음은 이미 이틀 뒤 결혼식과 신혼여행지로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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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전날은 가족들이 서로 덕담을 건네는 날인 줄 알았다. 하지만 결혼식 준비로 지친 우리는, 오늘만은 각자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어 했다. 반면 예비신랑은 멀리서 오신 부모님을 모시느라 분주했다.

그래도 우리 모두 내일 있을 결혼식을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준비에 들어갔다.


무엇보다 '화장을 잘 받으려면 일찍 자야 한다'는 기혼자들의 조언이 귓가를 맴돌았다.

하지만 내일에 대한 떨림과 체크리스트가 뒤엉켜 잠을 밀어냈다.

결국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감았다.



결혼식 D-day


그리고 아침이 왔다.

완벽할 것만 같았던 계획들은 이미 조금씩 어긋났고, 나의 마음속에는 기대와 긴장이 뒤섞여 있었다.

마흔에 맞이한 결혼식, 과연 어떤 두 가지가 나를 후회하게 만들었을까?






이른 아침, 아직 부은 얼굴로 예비신랑과 함께 미리 그려둔 최적의 동선을 따라 드레스샵으로 향했다.

햇살은 아직 졸린 얼굴로 도로 위에 엎드려 있었지만 도착한 샵 안은 이미 사람들로 빼곡했다.

그제야 오늘이 ‘길일’이라는 걸 알았다.


분주한 손길들과 서로 속닥거리는 목소리, 그리고 설렘의 냄새.

뻘쭘한 대기공간에는 각자의 결혼식을 준비하는 얼굴들이 앉아 있었고, 제법 긴 기다림 끝에 예비신랑이 먼저 헤어를 하러 들어갔다.

잠시 후, 이름이 호명되자 나도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5시간은 무너지지 않아야 할 머리에 스프레이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거울 속의 나는 조금씩 변해갔다.

예전 친구들의 결혼식에서 보던 화려함 대신 요즘은 얇고 투명한 메이크업이 유행이라 했다.


드레스 고를 때 상의했던 대로 헤어와 메이크업이 착착 진행될수록 거울 속 얼굴이 조금씩 신부로 변해갔고

‘오늘 결혼한다’는 실감이 점점 피부로 느껴졌다.

헤어 메이크업, 그리고 드레스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헬퍼 이모님과 함께 웨딩홀로 이동했다.


그때부터였다.

폭풍처럼 전화가 쏟아지기 시작한 건.



나는 신부대기실에 포토존처럼 앉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예비신랑은 끝없이 뛰어다녔다.

'결혼식 날 이렇게 신랑신부에게 전화하는 게 맞나?' 싶을 정도였고 이런 건 어디서도 들은 적 없었다.


전화 내용은 사소했지만 급했다. 가족 각자의 위치를 묻고, 짐 보관 장소 문의, 식권 분배 등등.

다행히 동생에게 '가방순이'를 부탁했고 그 덕에 동생도착 이후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반가운 친구들이 하나둘 도착해 빼꼼 고개를 내민 후, 신부대기실로 들어왔다.

메인사진작가님께서 잡아주는 구도에 따라 사진을 함께 찍었다.

"우리가 많이 찍어줄게."

서브 스냅 작가 사건을 알게 된 친구들은 성심성의껏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어느새 예식 5분 전.


신부대기실에서 식장뒤편으로 이동했다. 아빠와 손을 포개어 잡고 깜깜한 웨딩홀의 버진로드 뒤편에서 입장을 기다렸다.

우리 어릴 적 사진과 연애모습을 담아 손수 만든 식전영상이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다 꺼졌다.


남편 회사 후배인 사회자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식장에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두 분의 예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 순간, 내 옆의 아빠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라토너였던 할아버지 집안의 막내아들로 자라서 보기 드물게 사랑표현이 풍부한 경상도 남자 아빠와,

6·25 전쟁의 국가유공자이셨던 외할아버지가 전쟁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신 뒤, 전쟁의 그림자 속에서도 삶을 꿋꿋이 일구어야 했던 엄마.

그 두 사람의 첫째 딸인, 나.


그렇게 나는 ‘폭싹 속았수다’의 한 장면처럼

'그들의 푸름을 다 먹고 내가 나무가 되어.'

천천히 결혼식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밝게 핀 조명이 켜진 버진로드의 끝에 그가 서 있었다.

입모양으로 조용히 그가 말했다.

“괜찮아, 예쁘다.”

그 짧은 한마디에 긴장이 녹아내렸다.


우리는 함께 서약서를 또박또박 읽었다.

단어 하나 숨결 하나가 결혼이라는 문장 속에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직접 혼인선언을 해주시고 시아버지가 축사를 이어주셨다.

그 짧은 장면 속에는 세대의 시간과 마음이 교차했다.


하지만 예식은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혼인선언을 시작했는데 안경을 못 찾아 당황하시는 아빠, 재빨리 안경을 찾아 뛰어가시는 헬퍼 이모님, 눈물이 날 것 같던 아빠가 부모님과의 포옹순서에서 나를 노룩패스 하는 순간까지.


그리고 비밀리에 연습했던 남편의 축가가 시작되자 긴장이 완전히 풀렸다.

그의 목소리엔 떨림과 진심이 섞여 있었다. 한 음 한 음이 내게 닿을 때마다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 순간, 결혼식이 ‘행사’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더 와 닿았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또렷이 새겼다.






결혼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 끝났구나'라는 안도감과 함께 조용한 후회 두 가지가 따라왔다.


첫 번째 후회는 DVD 옵션을 추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서브스냅 작가님이 영상도 찍어주시기로 했지만, 결혼을 3일 앞두고 일정이 어그러지면서 결국 고화질영상으로 남기지 못했다. 그때는 ‘친구들이 찍어주면 괜찮겠지’ 싶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가장 아쉽다.


남편의 축가, 양가 아버지들의 혼인선언과 축사, 그리고 하객들의 모습과 웃음. 그 모든 것을 영상으로 다시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지금쯤 우리는 주말 저녁마다 그날의 장면을 돌려보며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후회는 신랑에게도 ‘가방순이’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예식 날, 남편은 쉴 틈이 없었다. 전화는 끊이지 않았고, 여러 확인전화와 축가 리허설, 멀리서 온 하객 맞이까지. 하루 종일 뛰어다니느라 결혼식 뷔페는 결국 먹지도 못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사촌동생에게 부탁할 거야. 신부만 헬퍼가 필요한 게 아니더라.”



그리고 살아보니 혼수 준비 과정에서도 후회들이 있었다.

안 써서 오버스펙이 되어버린 가전과 가구사이즈들이 아쉬웠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스팀 옵션이 달린 스타일러, 애벌빨래통을 추가했지만 결국 큰 통만 사용하는 세탁기, 잘못 잰 소파의 길이, 역시 사이즈 측정을 잘못해 식기세척기를 두 번이나 사게 된 일까지. 그때는 다 필요해 보였다.


"아이 생기면 쓰겠지."

"이 옵션은 꼭 추가하는게 좋겠는데? 유용할 것 같아."

그런 생각에 야심차게 구매했지만 막상 살아보니 쓰는 것만 쓰게됐다.






마흔에 결혼한다는 건, 어쩌면 '실수할 여유가 없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마흔이든 스물이든 첫 경험 앞에서는 누구나 서툴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후회를 어떻게 기억하느냐였다.

결혼식을 영상으로 남기지 못한 것,

신랑을 위한 헬퍼를 준비하지 못한 것,

혼수를 오버스펙으로 장만한 것.


모든 건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첫 기록’이었다. 첫 경험은 완벽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마흔에 처음 새기는 '우리'라는 이름은 모든 게 서툴렀지만 소중한 추억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흔에 첫 경험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가 인생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세상이 '늦었다'고 속삭일 때, 우리는 고개를 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우리에겐 수많은 '첫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첫 명절, 첫 부부싸움, 첫 대청소, 첫 기념일...

그 모든 순간을 완벽하게 해낼 순 없겠지만 후회하더라도 웃으며 다시 시작하려 한다.

결혼이 서로의 불완전함을 맞춰가는 일상 속의 연습이니까.


이제 막 시작된 우리 여정의 목적은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서로의 속도를 맞춰가며 함께 어른이 되어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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