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어서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결혼 후 근 20년간 아빠와 나는 서로 치열하게 하느라 전화하는 일이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했었다. 확실히 아빠나 나나 나이를 먹나 보다. 예전보단 자주 통화를 하곤 한다. 아빠가 심심하다고 먼저 전화하실 때도 있었고 내가 먼저 안부차 전화를 드릴 때도 있었다. 확실히 예전보단 전화를 주고받는 일이 많아졌다.
오늘도 엄마보단 아빠한테 먼저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한 해동안 열심히 살아내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잘 지내시냐고 여쭈었다. 아빠는 이제 동절기라 현장 근무를 잠깐 쉬신다고 하셨다. 알차게 놀아야 하는데 엄마가 동생들 산바라지 하느라 산 넘고 바다 건너 미국까지 가야 해서 놀 사람이 없다고 푸념하셨다.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재수했던 큰 아이 대학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셨다. 지방 국립대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는데 별안간 아빠가 물으셨다.
"지훈이는 괜찮아? 많이 안 힘들어해?"
아빠는 궁예이신가 보다. 관심법을 통해 내 마음을 꿰뚫고 계시는 것 같았다. 지훈이는 괜찮냐는 한마디에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겨우 겨우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 있었는데 안 힘들어하냐는 아빠의 송곳 같은 질문에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 부모가 되어보니까 알겠더라구요. 좌절하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요.
현실과 타협하면서 계속 좌절하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너무 힘들어요."
"힘들지... 그게 부모인 거야."
"엄마 아빠도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울먹거리며 겨우 겨우 내뱉는 내 얘기에 엄마 같았으면 '왜 울어, 울지 마~' 하셨을 텐데 아빠는 역시 아빠답게 당신 얘기를 묵묵히 꺼내셨다.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참 그런 게 감사했지. 그러면서 또 성장하고 크고 그러는 거고. 너희가 이렇게 잘 크고 잘 살아줘서 아빠도 고마워."
아빠는 유독 큰 딸인 나를 사랑해 주셨었다. 객관화가 잘 되신 엄마는 못난이인 나에게 이쁘다는 말씀을 잘 안 해주셨지만 아빠는 늘 '경아가 애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라고 하셨단다. 팔불출도 그런 팔불출이 없었다고. 어렸을 적 사진만 봐도 늘 아빠는 날 꼭 끌어안고 계신다. 안고 있는 걸로는 모자라 볼 부비부비로 물고 빨고 하셨던 원조 딸바보가 바로 우리 아빠였던 것이다.
아빠가 대기업에 다니신 덕에 그래도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IMF 풍파를 아빠도 피해 갈 수는 없으셨다. 출장을 끝내고 회사에 복귀하니, 당신 책상이 없어졌더라는 얘기에 '아, 그땐 그러셨나 보다.' 했었다. 그 당시엔 체감할 수 없었다. 직장 생활하기 전까진 그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버틴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나서야 아빠의 아픔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아빠가 모진 세상의 풍파와 싸워가면서 우리를 키워내셨다는 걸 요즘 이제 깨달아가고 있다. 얼마나 힘드셨을지, 얼마나 고생 많으셨을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하지만 그 안다... 에 그쳐 버리는걸. 머리카락으로 신을 만들어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자주 찾아뵙고 자주 전화라고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나 자신이 좀 한심해지는 것이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우리 옆에 계실 때 잘해야 하는데 그게 좀처럼 쉽지가 않다.
늘 부모님에게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지만 자식을 키우다 보니 그 마음이 더욱더 깊어지는 것 같다. 부모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어른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위로가 되어 주심에 감사드린다. 대학의 타이틀이나 결과보다는 마음 괜찮냐고, 많이 힘들어하지는 않냐는 아빠의 그 말씀이 나를 위로하고 또 낫게 만드셨다.
엄마가 안 계셔서 심심해하시는 아빠와 뭘 하고 놀아야 할지 좀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