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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집 루시 Apr 15. 2022

똥 밟으셨네요

저 세상 가고 싶지 않아서 정신건강의학과 내원한 후기

저는 입사한 지 일주일 만에 회사를 퇴사하였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자책 때문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생을 마감하는지 조금을 알 것 같더군요.

 

 어제 친구와 이번 퇴사 이슈에 대해 얘기하다가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가슴에 통증을 느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이거 이대로 방치했다간 요르단강 익스프레스 타겠는데? 저는 다음 날 바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정신건강의학과를 가려고 시도는 했었습니다. 두 곳을 갔었는데 한 곳은 폐업(!)을 한 상태였고 한 곳은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고 해서 되돌아왔었습니다.

 그리고 강남 쪽에 면접을 보러 간 김에 다시 한번 시도를 했습니다. 이번엔 한 5군데에 미리 전화를 했습니다.  당일 제일 빠르게 내원 가능한 곳을 찾았습니다.

 내원 전에 사전 체크리스트가 있었습니다. 리스트만 봐도 눈물이 나더라구요.



예시. 질문지만 봐도 너무 슬프다



얼마나 힘들면 리스트만 봐도 눈물이 날까 하면서 제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괜찮아, 괜찮아. 그리고 선생님과 상담 후 느낀 점 몇 가지를 적어봅니다.


1. 생각보다 진료비가 비싸지 않다.

 많은 분들이 상담비가 비싸다는 인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물론 상담비가 비싼 분야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도 상담사 선생님이신데 몇 주차에 몇십 만원씩 한다는 것을 알고 상담을 포기했었습니다. 의료 보험이 적용되냐 미적용이냐의 차이입니다. 목적도 결이 좀 다르긴 합니다.

 정신건강의학과는 초진이 2만 원대에서 3만 원 정도입니다. 저도 초진이었는데 3만 원대 정도 진료비가 나왔습니다. 특정 검사를 하게 되면 검사 비용이 발생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특별한 검사는 하지 않았고 선생님과 30분 정도 상담만 했습니다. 상담 시간이 늘어나면 진료비가 더 늘어나기는 하는데 크게 늘어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2. 초고도 전문적으로만 말씀하시지 않는다.

일주일 만에 퇴사를 했다는 히스토리와 그간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똥 밟으셨네요."


순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잘 못 들었습니다?"를 시전 할 뻔했습니다.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뿜을 뻔했습니다. 다행히 아무것도 마시지 않아서 망정이었습니다. 너무나 젠틀하고 엘리트적인 비주얼로 그런 상스런 표현을 하실 줄 누가 알았을까요. 순간 묘하게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선생님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고, 우리 모두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감해주시는 선생님께 너무나도 감사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사고같은 것으로 생각하라고 해주셨습니다. 아무도 예측 못했던 사고같은거 말이죠.


3. 처방전은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기

선생님께서는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으세요.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게 치료 과정이라고 해주셨어요.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먹고 싶은 거 먹으라니, 세상에 이렇게 큰 위로가 어딨을까요. 그리고 사람 만나는 것은 당분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현재 감정 기복이 심한 상태여서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저 또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니 아주 가까워서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이 아니면 만나는 것은 미루라고 해주시더라고요. 그것 또한 저에겐 힐링이었습니다.


4. 진료하자마자 막 항우울제 같은 건 처방해주지 않음

 가장 걱정스러웠던 것은 약 처방이었습니다. 막 항우울제, 신경안정제 복용하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부터 했었는데 인데놀을 처방해주시더라구요.  제가 편두통이 있어서 예방 목적으로 계속 복용하던 약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인데놀이었습니다. 인데놀은 다양하게 처방되는 약입니다. 고혈압, 심장약, 편두통 예방으로도 처방되는데 청심환 같은 역할도 한다고 해요. 검색해보면 면접 전이나 중요한 발표 전에 먹었다는 후기가 올라와 있어요. 그러면서 세로토닌 계열의 약을 처방해 주셨습니다. 처방해주신 약들은 집중력도 높여주고, 우울이나 불안 증세도 가라앉혀주고, 잠도 잘 잘 수 있게 도와주는 약들이라고 하셨습니다(세로토닌은 행복 호르몬인 거 다들 아시죠?). 다음 주부터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기로 했는데 새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사실 직전 회사에 적응할 때 평소에 꾸지도 않던 악몽도 꾸고 불안도가 높았었거든요. 그래서 이런 약물 처방 등이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데에도 매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을 복용할 때에는 처음 적응하는 기간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가볍게 시작한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약들은 의존도가 없다고 하셨어요. 안도가 되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후회되는 일은 없으세요?"

"나는 왜 이렇게 능력이 부족할까.
역량이 충분했더라면 지시했던 업무를 천재적으로 처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선생님 앞이니 솔직히 털어놨습니다. 선생님께선 '스스로에게 비현실적인 자아를 기대하시는군요'라고 말씀해주시더군요. 어떤 문제에 대해서 원인은 본인에게 돌리는 것을 내적귀인이라고 하는데 내적귀인보다는 외적 귀인으로 시선을 돌리라고 해주셨습니다. 자책보다는 자기 합리화가 정신 건강에 더 도움이 된다는 얘기죠. 사람은 저마다 외적 귀인을 활용하는 방법을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데 현재 이 부분을 적극 활용하라고 하셨습니다. 공감이 되었습니다. 제가 자주 쓰는 말은 '내가 쓰레기가 아니라 세상이 쓰레기'에요. 그 업무는 아무도 감당 못할 일이었습니다. 자꾸 자책하며 모든 문제를 제 탓으로 돌리려는 저에게 큰 위로가 돼주셨습니다. 전문가는 역시 전문가입니다.


 선생님은 중간중간 제 얘기들을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그런 사람들이 내원을 해야 하는데 정작 와야 할 사람은 안 오고 피해자들이 오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랬습니다. 정작 병원에 내원해야할 사람들은 왜 문제를 모를까요. 왜 애꿏은 사람들이 죽기 살기로 살아내려고 애를 쓰는 걸까요. 저는 이번에 병원 내원을 하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부러지거나, 피가 철철 흐르는 사고를 당하면 응급실에 바로 달려가십니다. 하지만 마음이 부러지거나 피가 흐르면 '자연스레 나을 때 되면 낫겠지, 이 또한 흘러가겠지' 하며 셀프 응급 처치만 하고 방치합니다. 그러면 그 부위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곪게 되거나 깊은 상처가 남게 되지요.


 마음도 제대로 치료해줘야 합니다. 꼬박꼬박 약을 먹어야 하는 게 부담스러우면 그냥 상담만 받고 속내만 털어내고 오셔도 어느 정도 치료가 됩니다. 일단 저는 그랬습니다. 그분들은 전문가이기 때문에 믿고 기대해도 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많은 분들께서 이 글을 보시고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인식을 가볍게 가지셨으면 합니다. 생각보다 진입 장벽이 매우 낮으니 적극적으로 활용하셨으면 좋겠구요. 접근성이 좋아야 하니 집이나 직장에서 가까운 곳을 추천드립니다.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하게 사회생활하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이별 때문에, 인간 관계 때문에 힘드신 분들께 적극 추천드립니다. 혼자 앓지 말고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서 상처 치료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나하나 매우 소중한 존재이니까요.


#정신건강의학과바이럴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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