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숲이김 Oct 26. 2020

한 지붕 네 취향


추석 첫번째 날이지만 여차마을 할머니댁은 한산했다. 내일이라고 인원이 더 불어날 일은 없다. 큰아버지댁 대표로 큰아버지만 오셨고, 작은 아버지댁에선 작은 아버지가 내일 오실 예정이었다. 민족의 대명절이라고 친척 모두가 모이는 것도 옛날 말이다. 특히 3대에 들어선 각자 바쁜 이유가 있다며 우리집의 나와 김지영을 빼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할머니는 좀 서운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안락한 추석이어서 좋았다. 일단 사람이 별로 없으니 차릴 음식도 훨씬 적었고 —물론 내가 음식을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도 안하는 일 우리 엄마만 하는 건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나니까—좁은 옛날집에 사람이 북적이는 느낌 자체도 하는 것 없이 피곤한 법이다.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 다같이 준비를 하니 대가족 느낌이 들었다. KBS에서는 오늘 밤 특집으로 단 한번 나훈아 콘서트를 한다고 광고 중이었다. 그것을 보자 아빠는 ‘저거 봐야 된다, 오늘 꼭 봐야 된다.’ 라고 다 들으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빠가 상을 차리며 그 이야기를 할 때 엄마는 부엌에 있었고, 나와 김지영은 문이 열려있는 방에 있었다. 엄마는 요리 소리에 아빠가 나훈아 콘서트를 봐야한다고 말하는 것을 못 들었고, 김지영은 아까부터 무선 이어폰을 끼고 뭘 보는건지 연신 낄낄거린다.


문제의 나훈아 콘서트 방영 시간이 되자 아빠는 채널을 고정시켜놓고 앉았다. 그 때 엄마도 나와서 리모콘을 찾기 시작했다.



- 리모콘 어디 갔노.


- 왜?


- 사랑의 콜센타 봐야 된다.


- 안 된다 ! 이거 볼 기다.


- 티비 보지도 않더니 별스럽구로.



엄마는 코웃음을 치더니, 요즘 트로트도 젊은 애들이 불러야 볼 맛이 난다며 백발에 백수염을 기른 나훈아를 보고선  ‘산신령’ 이 따로 없다고 했다. 마침 민소매 흰 셔츠를 입은 채 땀을 흘리고 있던 나훈아는 빼빼 마른 할아버지 산신령이 아니라 막 나무를 끝낸 신체 건장한 나무꾼과 더 흡사했기에 나는 남몰래 입을 틀어막고 웃었다.


눈을 바로 옆으로 돌려보니 김지영은 어느새 게임 방송을 끝내고 인지도를 이제 막 쌓아가고 있는 아이돌의 신곡 쇼케이스 무대를 유투브로 보고 있었다. 요즘 신곡 뮤직비디오를 유투브에서 최초 공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애저녁에 그 그룹을 구독해놓은 김지영이 알림을 보자마자 켠 것이 틀림없다. 와이파이 없는 할머니집에 대해 하도 궁시렁거리길래 뭐가 문제냐고 물었더니 오늘 꼭 봐야할 것이 있는데 자긴 데이터가 없다고 했다. 그런 측은한 꼴을 차마 못 본 척 할 수 없는 호구 언니가 연결해준 무제한 인터넷 테더링덕분에 김지영은 오빠들의 영상을 무한 반복한다.


김지영의 화려한 구독 리스트를 염탐하고 있을 때 나도 에어팟으로 음악을 듣던 중이었는데, 그건 유투브에서 요즘 초고화질로 복원해 올려주는 이소라의 프로포즈다. 90년대 이소라의 보랏빛 벨벳 드레스와 갈색 립스틱이 처음 볼 땐 다소 충격적인데 이상한 건 몽환적인 그 프로그램의 분위기에 정말 잘 어울린다. 난 90년대에 태어나서 프로포즈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여러 음악을 들어본 결과 90년대의 음악이 내 정서에 잘 맞다보니 관련 영상을 자동 추천받다가 거기까지 갔다. 거실에 퍼지는 흥겨운 트로트나 아이돌의 칼군무하고는 전혀 결이 다른 음악이며, 유명했던 아티스트들의 초창기 시절을 보며 그 풋풋함에 놀라는 재미가 있다.


바로 저 앞에선 나훈아의 트로트가 들려오지, 엄마는 콜센타에서 우리 찬원이가 저걸 불렀으면 잘했을거라며 중얼거리지, 옆의 김지영의 핸드폰 화면에선 아이돌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지, 나는 나대로 방해받기 싫어 볼륨을 높이고 90년대의 낭만적이고 애수 깊은 음악에 집중하고 있다.


클래식 TV 스타 나훈아, 신세대 트로트 TV 경연, 유투브로 복원된 이소라의 프로포즈, 유투브 최초 공개 아이돌 쇼케이스. 한 지붕 아래 수십년을 같이 살아온 네 사람도 세대에 따라 취향 차이가 이리도 극명하니 고개가 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이래서 대한민국 통일은 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일요일 오후의 오래된 돗자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