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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Oct 10. 2020

여차마을 어부 김명실 할아버지


어렸을 때 나를 따라다니던 꼬리표 중 정말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었다. 파김치. 할머니댁에 도착하면 동네 어른이 나를 보고 하던 소리였다. 파김치가 되어버린 어린 민주는 비실거리다가 할머니댁 두 번째 방의 매트리스에 드러눕고 말았다. 차에서 내렸어도 빙글빙글 도는 시야가 괴로워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 여러모로 나았다. 축 늘어진 나를 보고 어른들은 누굴 닮아서 저럴까 궁금해했는데, 할머니가 그 궁금증을 한 방에 정리했다. 누굴 닮았겠노?


정작 나만이 누굴 닮아서 그렇게 멀미를 달고 다녔는지를 몰랐다. 토한 기억은 허다하지만 그 중 가장 강렬한 것은 직선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리아스식 남해안 도로를 달리다가 중간에 멈춘 일이다. 너무 급했던 나는 신발도 신지 못하고 차 문을 열고 나왔다. 불행히도 그 때는 한여름이라 샌달을 신던 시즌이었다. 샌달 없이 차 문을 나섰다는 것은 맨발로 한낮의 달구어진 아스팔트 도로를 밟았음을 의미했다.


아홉살 민주는 본인의 부주의함과 멀미의 히스토리에 너무 단련되어 심각성을 별로 느끼지 못한 부모의 무관심 덕분에 신발을 신지 못하고 토를 시작했다. 등을 두드려주던 엄마는 왜 애가 팔딱팔딱거리면서 토를 하는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다. 가엾은 민주는 토하랴 눈물 흘리랴 바쁜 와중에 잠시라도 발을 아스팔트에서 떼어놓고자 한발씩 번갈아가면서 파닥였다. 앗 뜨거, 앗 뜨거!


엄마는 아주 미안했던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아홉 살 인생>이라는 작품이 괜히 탄생한 줄 아는가? 그 나이가 되면 상대방의 표정을 보고 속마음 정도는 간파할 수 있다. 아이고 쭈야, 신발을 안 신었나. 엄마는 분명 웃고 있었다.



내 토사물을 곳곳에서 받아내었을 남해안 도로가 인도한 것은 여차마을이다. 거제도 중에서도 거의 최남단에 해당되는 이 바닷 마을은 아는 사람만 가끔씩 찾아와 해변가의 몽돌을 만지는 곳이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민박집을 겸하고, 미역을 말려 팔며,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곳. 마을 사람 모두는 어부이거나 해녀라고 할 수 있겠다.


여차 마을에 있던 시골집은 거의 다 사라지고 어느샌가 현대적인 펜션으로 모두 탈바꿈했지만 아직까지도 옛날의 빨간 벽돌집 하나가 남아있다. 빨간 벽돌집의 바로 뒷 편엔 어디 사극에서나 나올 법한 구멍난 문풍지달린 옛날 집이 있다. 그 작은 집의 마루 위엔 멀리까지 냄새 풍기는 큰 생선이 말려져 있고 일부분은 뜯겨나가 있다. 분명 동네 고양이 몇 놈이 날래게 한 입 먹고 튀었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쓰지 않는 게 틀림없는 빨간 벽돌집의 주인 내외는 김명실 할아버지와 조순이 할머니다. 괭이 새끼가 또 괴기 뜯어먹었제, 하고 한 마디 툴툴거리면 그만이다.


집에 말려져 있는 이 괴기들은 다 조순이 할머니의 솜씨다. 최근의 트로트 열풍으로 나훈아의 ‘18세 순이’라는 노래를 알게 되었는데, 그 바람에 내가 아는 유일한 순이의 젊은 시절을 상상해보게 됐다. 빨간 벽돌집에 굴러다니는 미역 조각과 이제는 지워지지 않는 말린 생선 냄새는 물질 잘하기로 유명한 18세 순이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차 마을의 모든 이는 해녀 아니면 어부인데, 어찌 빨간 벽돌집에 바닷 내음이 밴 것을 순이의 공으로만 치부할 수 있겠냐만은. 바로 그 점이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바이자 어린 민주가 토쟁이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유전적 이유이기도 하다.


김명실 할아버지에 관한 추억은 몇 가지 장면으로 간단하게 추려진다. 대표적으론 빨간 벽돌집의 남아도는 수협 달력을 가져다가 흑염소에게 찢어 먹이는 일이다. 김명실 할아버지는 펫을 여러 마리 소장했지만 그 중 최애 펫은 이 흑염소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집에서 배운대로 귤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던 나를 극구 만류해 그것을 바구니에 모으라고 시켰다. 나중엔 그를 따라가서 바구니에 모은 귤껍질을 흑염소 앞에서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어디 밭에서 가져왔다며 고구마나 감자, 채소 같은 것을 흙 묻은 손으로 가져오던 모습이다. 늘상 신던 흰 고무신에는 언제나 흙가루가 연하게 묻어 있었다.


김명실 할아버지는 민주가 빨간 벽돌집을 방문할 때마다 할아버지 손을 잡아드릴만큼 커져버렸을 때 꼭 이렇게 말했다.



- 이 손 가지고 뭐 해먹고 살겠노?



처음에는 내 섬섬옥수를 바닷마을 사람 특유의 투박한 방식으로 칭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멘트를 여러번 들으니 그가 진심으로 묻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중엔 할아버지에게 대답을 해주게 되었다.



- 이 손 가지고 걸레나 뽈겠나?


- 고무장갑 끼면 되잖아요.



그럼 할아버지는 또 뭐시라, 하고 나를 보더니 내가 ‘전 손 시려워서 고무장갑 안 끼면 안 돼요.’ 라고 말하면 허허 웃고 마는 것이다. 이런 실없는 미소를 보면 여태까지 동네 고양이들이 어찌 굶지 않고 몰래 먹튀를 할 수 있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바닷마을 사람들은 특정 시즌이 되면 다 함께 하는 일이 있다. 해녀들은 몽돌 해변에서 다같이 미역을 말렸다. 몽돌 해변은 미역을 말리기에 최적의 장소다. 묻을 모래도 없고 햇볕에 가열된 오후의 몽돌은 맥반석 달걀처럼 뜨끈해져 미역의 물기를 잡아주는데 제격이다. 어부들은 다같이 배를 타고 나가 낚시를 하고 돌아온다. 낚시 후 좋은 횟감은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내가 빨간 벽돌집에 있을 때, 갑자기 ‘이것 좀 드소!’ 하면서 실하고 싱싱한 생선을 주고 간 이웃이 여러명이다.


그 날도 동네 사람들이 낚시를 다녀왔는지 누군가가 생선을 또 놓고 갔는데, 그러고보니 왜 할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의 가장 핫한 소셜 네트워킹인 낚시에 참여를 하지 않고 흑염소 먹이나 주러 다니는지 궁금해졌다. 혹시 김명실 할아버지는 왕따인 것일까? 그 때 마침 할머니가 들어오길래 물어보았다.



- 근데 할아버지는 왜 낚시를 안 가요?


- 낚시? 아이고 마, 낚시는 무신 낚시 !


- 왜요? 어부잖아요.


- 배만 타믄 무시로 토를 해샀는데 무신 괴기를 잡노?


- ?


- 을매나 토를 해샀는지 보도 몬한다. 마 안 타는기 도와주는 기다.



빨간 벽돌집에만 오면 순이의 곁을 졸졸 따라다니며 도울 일이 없나 맴도는 아빠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 아빠, 할아버지 어부 아니었어요?


- 어부인데 멀미때문에 배를 못 타서 농사 짓는다.


 - 그게 무슨 어부예요?



하지만 김명실 할아버지 본인 말로는 자기는 절대 농부가 아니라 어부라고 한다. 그는 단지 소일거리로 취미삼아 작은 농사를 짓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다고 하기엔 그의 흰 고무신에 착색된 누런 흙먼지 빛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만 본인이 그렇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하긴, 바닷마을에 태어났다고 해서 다 배 잘 타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태어나는 여건은 선택할 수도 없고, 내 취향과 꿈이 내가 태어난 곳에 속박된다면 그또한 끔찍한 일이다.


할아버지는 배를 잘 타고 싶어했던 것 같기는 하다. 배타기를 여러번 시도했지만 멀미가 DNA에 워낙 깊숙히 내장되어 있었던 지라 나중엔 그의 승선을 돕고자 했던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포기를 종용했다. 그 때문일까? 김명실 할아버지가 동네에서 물질으로 알아주는 18세 순이를 만난 것은 바다를 자유로이 누비고 싶었던 그의 꿈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고기로 본인 배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멀미로 고기의 배를 불려주던 동물 박애주의자이자, 그런 와중에 어찌 먹고 살겠냐고 내 걱정까지 해주던 세상에 더 없을 휴머니스트. 잘하고 싶은 일이 잘 안될 때 나는 김명실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배만 타면 멀미를 하는 김명실 할아버지도 어부라는데 나도 있는 힘껏 더 버텨봐도 되지 않을까. 꿈을 향한 항해는 누구에게나 순탄하지 않아서 멀미 한번쯤은 하게 된다. 멀미가 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우겨봐야 한다. 그는 어부라는 타이틀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세상을 버린 지금에서도 우리에게 어부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여차마을 김명실 할아버지는 어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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