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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Jan 06. 2021

3인 가족 3명이 자가격리다


코로나의 중대한 위기를 꼽자면 처음 발병했을 때의 공포감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상황은 양반이었지만 미지의 대상이라 공포감이 컸던 탓이다.), 모 사이비 종교로 인한 대구 일대의 확진자 증폭, 그리고 지금 수도권의 위기 이 세 개 정도다. 내가 직장 때문에 서울로 가면서 오랫동안 4인 가족이던 우리 가족은 3인 가족이 되었는데 엄마, 아빠, 김지영은 늘 가장 위험 지역에 사는 내 걱정을 했다. 어디 돌아 다니지 마라, 비싸도 그냥 시켜 먹어라, 포장해서 먹어라 등.


내가 어디 갈 데도 없어요, 라고 말해도 엄마, 아빠는 늘 랜선으로 걱정을 달고 살았는데 이번에 고향에 내려와보니 이해가 됐다. 우리 가족 중 나를 제외하고 모두 자가 격리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사실상 떨어져 나간 사람이니 3인 가족 중 3명 모두가 자가 격리를 한 셈이다.






먼저 시작은 우리 동생. 동생은 작년 상반기 교환 학생으로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학기를 시작하기 전 그랜드 캐니언 일대를 여행했으며, 중간 방학 때는 시카고나 뉴욕 등 유명 도시들을 다 돌아볼 꿈을 품고 있었다. 코로나가 1월부터 터지기 시작했고, 그 시작은 미국보다 대한민국이 더 빨랐기 때문에 김지영은 그저 팝콘이나 먹는 심정으로 한국의 신종 질병 사태를 지켜봤다. 미국 대통령조차도 훗날 하루에 수 십만명의 확진자가 나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혐오 발언을 하고 있던 때다. 그 때만해도 김지영은 정말 마스크를 사기 위해서 저렇게 줄을 서냐며 태평스럽게 물어보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환자가 급격하게 터져나오기 시작하자 갑자기 유학생을 관리하는 대학 코디네이터가 단톡방에 일제히 가장 빠른 시일 내에 비행기를 각자 알아서 구해 돌아올 것을 강력 권고했고, 이에 불응할 시 뒷일은 책임지지 못한다며 싹 선을 그었다. 모두가 덜컥 겁이 나서 우왕좌왕 하는데 이런 때 상황 판단이 빠른 우리 김지영은 가장 비싸지만 가장 빨리 돌아갈 수 있는 LA 환승 비행기를 끊었다.


그 때는 비행기 품귀 현상이 극심해 비행기가 얼마 있지도 않았고, 아무리 싼 비행기라도 가격이 평소보다 매우 올라있었다. 김지영을 제외한 많은 유학생들이 그나마 저렴한 비행기를 끊었다고 한다. 김지영은 그 곳의 친구들 중에서 가장 먼저(ㅋㅋㅋ) 출발 했는데 운 좋게 별 일 없이 바로 인천공항에 내렸다. '벌써 왔어?' 라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돌아올 때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으니 가장 비싼 비행기를 택한 보람이 있었다. 공항에서 한국인 유학생들을 많이 만났는데 자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학생들의 비행기가 장시간 지연되거나, 갑자기 취소되어 그들 모두가 멘붕에 빠져 있었다고 했다. 김지영은 가장 높은 가격을 지불한 대가로 아무런 문제 없이 스케줄대로 도착했다.


고향에 도착하니 보건소에서 미국에서 귀국한 자는 먼저 연락을 바란다고 재난안내문자가 와 있었고, 동생은 그 길로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우리집에서 검사를 받은 것은 동생이 처음인지라 무척 떨리고 긴장되어서 내가 서울에서 몇 번이나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냈다. 결과가 예상보다도 좀 늦게 나와서 별 별 생각을 다 했다. 다행히 동생은 음성이고, 의무 자가격리자는 아니었지만 보건소 직원은 자발적으로 2주 자가 격리를 권고 했다. 동생은 그를 철저하게 지켰고 2주 동안 먹고 싶은 것을 합법적으로 엄마에게 요구하면서 올드보이 생활을 했다.




다음은 우리 엄마. 엄마는 사실 우리 4명 중 가장 비접촉 생활을 철저히 지킨 사람이다. 철없는 내가 '드라이브라도 가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 '이 난리통에 나가긴 어딜 나가노!' 라고 주저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사이비 종교 파문 때를 제외하고 내 고향은 잠잠했고 확진자도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 때 엄마는 실로 오랜만에, 사실은 그 해 처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 중에 확진자가 있었다.


나는 그 때 서울에 있었으므로 엄마가 자가 격리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는데, 어쩐지 엄마가 그 즈음 밖에 나가지 말라는 잔소리를 너무 심하게 해서 짜증을 낸 적도 있었다. 어디 가지도 않는데 그 말을 왜 자꾸 하는 거에요? 갈 데가 없다고요. 이제 보니 본인이 제 발 저려서 그런 것이다.


엄마의 자가격리 소식을 알게 된 것도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 아빠와 전화를 하는데 전화를 끊을 무렵 아빠가 갑자기 '그 소식 들었나?'를 물어봤다. 무슨 소식이요? 아빠는 마치 어디 거리에서 들은 뜬 소문처럼 운을 띄워놓더니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느그 엄마 자가격리다. 나만 길길이 날뛰었다.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해요?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죠?


엄마는 우리 중 가장 생활 방역에 철저한 사람인데 단 한번의 식사로 가슴 철렁한 경험을 했다. 엄마는 밀접 접촉자로 2주 의무 자가격리를 해야 했다. 다행히 음성. 그 식사 자리에는 추가 감염자는 아무도 없었다.  



마지막은 우리 아빠. 동생이 보건소에 갈 때도 아닐 기다, 라고 혼자 낙관하고 엄마가 자가 격리할 때는 혹시 모르니까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문을 철저히 걸어 잠근(...) 낙관 주의자이자 무념무상의 아이콘. 남들이 마스크를 쓸 때도, 마스크를 사려고 줄을 길게 설 때 조차도 아빠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빠는 마스크가 필요가 없을 정도로 원래부터 집돌이 중의 집돌이이기 때문이다. 자가용을 타고 다니고, 집 밖엔 일체 나가지도 않는다. 그 때는 직장 내에서 마스크를 필수 착용하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본인은 그렇게 헐렁하게 살면서 내가 서울에서 마스크를 잘 끼고 다니는 지는 꼭 꼼꼼하게 확인을 했다(ㅋㅋㅋ). 마스크는 잘 끼고 다니나? 네. 아빠나 잘 하세요.


그렇게 헐렁하게 살던 아빠에게 위기가 찾아 왔는데 갑자기 방 안에 있다가 혼자서 '억, 이게 뭐고!' 소리를 질렀다. 사실 난 그 소리를 듣고 오늘도 주식이 망했구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빠가 갑자기 일어나서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누워 있을 수 있다면 내내 누워 지내는 사람이기에 서서 걸어다닌다면 그건 긴급 상황이 맞다. 엄마가 와 그라노? 를 물어보니 아빠가 정처 없는 맨 발걸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회사에서 확진자 나왔단다.  


뭐라구요? 그 날은 내가 연말 연초를 기념하며 케익도 불고, 와인도 먹을 꿈에 부풀어서 고향집에 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현재 수도권이 가장 위험한 지역인지라 피신을 해야겠다며 이리로 왔는데, 오자마자 이젠 집에서도 마스크를 껴야 하다니! 케익과 와인은 커녕 우리는 집에 이미 구비되어 있는 살균 소독제와 소독 티슈부터 손에 집어 들었다. 마스크를 끼고 집을 여기저기 닦으면서 세균 뿐만 아니라 연말 만찬의 꿈도 지워냈다.  


아빠도 보건소 검사를 받으러 가야했는데 이젠 엄마와 김지영은 아무런 근심도 없이 ' 다녀와~!' 외쳤다. 이제  번째니 길을 모를 리도 없고 옛날처럼 누군가가 걱정스럽게 동행해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을 처음  나만 누군가가 따라가 줘야 하는거 아냐?, 하고 생각했다. 아빠는 혼자서 가더니 갑자기 커다란 박스를   짊어지고 집에 왔다. 이게 ? 자가 격리 하란다.



뉴스에서나 보던 자가 격리 박스를 처음 봤는데 그것을 떨리는 마음으로 풀어본 것은 오직 나 뿐이다. 나를 제외한 3명은 엄마의 자가 격리 때 이미 이 박스를 다 구경했다. 이런 것도 챙겨주고 정말 좋은 나라라고 중얼거리며 그 안에 있는 레트로 식품, 생수, 방역 티슈, 방역 살균제를 구경 했다. 엄마가 옆에서 보더니 자기가 받을 때랑은 차이가 좀 있다며 예전엔 마스크가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이제는 보건용 마스크가 몇 개 밖에 없다고 했다. 이제 마스크를 수급하는 것은 우리가 확실하게 극복한 문제라서 그런 것 같다.


사실 그것들만 봤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무시무시한 마크가 그려진 쓰레기 봉투를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엄마가 자가 격리자들은 쓰레기도 마음대로 못 버린다며 쓰레기를 따로 이렇게 모아두고 방역 관련 실무자들이 이것을 수거해 간다고 했다. 그려진 마크가 마치 핵 폐기물 표시 같다. 우린 아빠에게 마스크를 씌우고 매일 누워 있는 방에 가두었다. 아빠가 뭔가를 달라고 거실에 나오면 동생과 엄마는 소리를 질렀다.



- 왜 나오노!


- 배가 고프니까 그렇지.


- 나오지 말고 카톡으로 말해라!



특히 엄마는 자기가 자가 격리를 할 때 엄마가 조금이라도 밖에 나오면 버럭 화를 낸 아빠의 행태를 고발하며, 난리칠 때는 언제고 이젠 자기가 뽀로로 기어 나온다며 욕을 했다. 아빠는 본인이 아닐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는데 우리는 잇따른 자가 격리 경험으로 입을 모아 저렇게 부주의한 사람 때문에 환자가 줄어들지 않는 것이라며 아빠를 비난했다.


그런데 아빠는 정말로 그 날 하루만 자가 격리를 하고 풀려났다. 아빠는 확진자와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확진자가 쓰고 나간 사무실을 나중에 들어간 것이며, 우리 고향 도시 말고 나머지 다른 도시에서는 아빠와 같이 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검사만 했을 뿐 아무도 자가 격리 판정을 내리지 않았다. 아빠가 그 사실을 보건소에 이야기하니 담당자는 다른 시 관계자와 이야기 한 후 자가 격리 조치를 해제시켰다. 아빠는 즐거워 하며 내가 풀어 놓고 구경한 자가 격리 박스를 다음 날 다시 가져다 줬다.


어쨌든 우리는 밥을 4명 다 같이 먹을 수 있게 됐다. 밥을 먹으면서 내가 말했다.



- 아니 나한테 조심하라고 그렇게 난리더니, 지금 나 빼고 싹 다 자가격리 한 거 알아요?



엄마, 아빠, 김지영은 'ㅋㅋ' 웃기만 하면서 고개를 숙인다.



- 제발 본인들이나 잘 하세요. 가족이 3명인데 3명이 다 자가 격리 한 게 말이 돼요?



이 세 명은 모든 유형의 감염 경로를 대표한다. 해외 유입/ 밀접 접촉/ 간접 접촉. 아무도 걸린 사람이 없지만 코로나가 정말 턱 끝까지 추격해 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다행히 난 어디에도 해당 사항이 없다. 제발 조심들 좀 하세요. 앞으로도 난 절대 따라 잡히지 않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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