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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Sep 03. 2021

환영받지 못한 자원봉사자


일과 사랑이 잘 풀리지 않아 고뇌하다가 유학을 떠나버리는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다. 이렇게 그냥 가버린다고? 여기서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 거기에 간다고 해결될까? 그런 궁금증이 어린 마음에도 맴돌았다. 그것이 다소 무책임해보이거나 별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나름 어른스러운 척을 하며 생각했던 모양인데, 지금 와선 떠남의 미학을 전혀 알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 어린 시절의 패기가 귀엽기만 하다.


도피자의 마음가짐이란 어때야 할까. 국제 구호단체나 선교단체의 일원까진 아니더라도 나의 아프리카행은 명목상 교육 분야의 자원봉사나 다름없었다. 자진해서 모국보다 험한 나라로 가는 일이라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며, 무엇보다도 그 나라에서 내가 맞이할 일과 안정성을 누구도 담보할 수 없다는 막연함이 끊임없는 스트레스를 만들어냈다.


그런 막연함은 이전에 이 땅에 다녀오신 정말 몇 안되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로 배가 되었다. 준비하려고 하지 마세요. 어차피 소용이 없을테니까. 준비조차도 소용이 없으면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여러 질문을 했지만 기파견자 선생님들과의 의사소통이 백퍼센트 된 것 같지 않았다. 기파견 선생님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설명해줘도 경험해보지 않은 입장에선 이 모든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담도 전부 유효한 것이 아니며 개인마다 가서 처할 상황이 또 다를테니 직접 부딪쳐보라는 것이 이야기의 요지였다.


어쨌든 그 때까지만 해도 국립국제교육원이 잡아준 우리의 콘셉트는 자원봉사자였다. 한국 정부의 이름으로 보내는 파견자들이기에 연수를 받아야 했고, 보험이나 예방 접종 등의 절차도 엄격하게 안내를 받았다. 우리는 한국의 교육부와 파견국인 보츠와나의 교육부 간에 맺은 공식 협약으로 파견되는 것이었기에 교육부 간의 협약과 각 지원자의 발령이 공식으로 문서화 되었다. 내가 가게 될 지역은 수도도 아니요, 관광지로 유명한 지역도 아닌 '부시맨의 고향'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칼라하리 사막권역이기에 부시맨이라고 불리운 이 땅의 토착민들이 많이 사는 곳이며 이 지역에서 수도까지는 차로 무려 8시간을 이동해야 한다. 사실 이 지역은 보츠와나의 수도보다 옆 나라인 나미비아의 수도까지 가는 것이 더 가까웠다.


좋은 일을 하러, 그것도 국가 간의 협약 아래서 어떤 임무를 맡고 파견된다는 그런 분위기가 늘상 주입되었기에 출근 첫 날, 나는 신경 좀 썼다는 태를 내면서 학교에 갔다. 학교는 내가 교육청으로부터 제공받은 관사에서 걸어서 10분이면 있는 곳이었지만 길을 잃을까봐 염려되어 좀 일찍 출발했고,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멘 학생들이 길가에 보이자 안심이 되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한 치의 피곤한 기색도 없이 빛나고 있었고 그 눈에서 뻗쳐나오는 호기심이 내 가슴으로 툭툭 떨어졌다. 예상보다도 더 뜨거운 관심(?)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빨리 움직여 하교길의 파파라치들에게서 멀어져 갔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나의 목적지는 뜨거운 관심을 표하며 나를 쫓아다닐 귀여운 파파라치들의 소굴, 학교가 아닌가. 여기가 정문이 맞나 싶은 조잡한 철조망을 지나 학교 안으로 들어서는데, 그 곳의 강렬한 눈동자를 의식할 새도 없이 내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여기가 도대체 학교인지 아니면 난민촌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교실로 보이는 건물이 부서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원래 그런 상태는 아니고 공사를 한다고 건물의 상당 부분이 그 속을 훤히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는 학생들의 교육에 방해를 주면 안되기에 방학 때 이루어지는 것이 상식인데, 그럼 이 많은 학생들은 대체 어디서 공부를 하나 싶었다.


교실 건물 세 개가 통째로 지붕이 없다.


중앙의 공터를 기준으로 양 옆엔 헐린 교실이 있고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곳은 사막이므로 자세히보니 기본적인 토양이 모래였다—이 펼쳐져 있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가방을 멘 아이들이 그리로 향하고 있었기에 나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아이들을 따라가 보았다.


아이들은 신기한 것을 보는 듯 나를 바라보거나 수줍게 손을 흔들었고, 당찬 아이들은 와서 영어로 말을 걸기도 하였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어딘가 낯이 익었는데, 마치 종군 기자가 찍은 한국 전쟁 이후 어린아이들 같았다. 아이들의 뒤에 용도를 알 수 없는 천막이 있어 더욱 그래보였다. 정말 폐허나 다름없는 곳인데 이 곳이 학교라고 가방을 멘 채로 나를 구경하는 얼굴엔 천진난만한 장난기가 감돌았다.


내가 영어로 왜 아무것도 없는 이 곳으로 왔는지 물어도 아이들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당차게 영어로 인사를 건네던 아이들도 대화를 더 시도하니 웃기만 했다. 아이들이 아침에 놀이나 운동을 하는 운동장 치고는 아무것도 있는게 없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옆에서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뭉쳐져 있던 천 아래서 뭔가 꿈틀꿈틀거렸다. 천이 바닥에 버려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래서 목소리가 들렸고, 천이 갑자기 공중으로 쑥 솟아올랐다.


눈이 동그래져 계속 바라보는데, 천 아래에서 한 무리의 남자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제 보니 몸집이 조그마한 아이들이 천 아래에 들어가서 기둥을 세우는 중이었다. 천막은 여느 구호단체나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한국 나이로는 10살도 안되어 보일법한 꾸러기들이 소리를 질러가며 '이리로 옮겨라 저리로 당겨라' 하면서 세우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저 너머에 있던 천막 여러 개가 그냥 천막이 아니라 교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꼬마들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교실이 없어서 교실을 이 벌판에서 만들던 중이었다. 천막치는 꼬마들을 바라보던 아연실색한 내 얼굴이 퍽이나 우스웠던 모양인지 꼬마들은 나를 보고 깔깔 웃으며 박수를 쳤다.


교실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지나쳤던 천막에 그제서야 들어가 보았다. 이것도 교실이라고 어디서 급히 떼어온  같은 칠판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뭐가 보이기는 할까 싶었다. 천막 내부는 학교 공부가 아니라 여름밤의 낭만적인 캠핑 혹은 공포 체험 정도에 쓰여야 알맞을 정도로 어두웠다.  와중에 어둠의 밝힐 백열 전구(!) 있긴 있었다는 것이 인상 깊었는데, 전구의 밝기는 그보다  인상적으로 어두웠다. 천막 안에 있는 의자의 수또한 4-50 정도로 빽빽히 들어차 있었다. 천막 내부를 살펴볼수록 궁금증은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증폭되기만 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어떻게 칠판을 보고 무언가를  수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선생님은 분명  천막 안에서 제대로 허리를 펴고  있지도 못할  같은데.


 곳을 구경만 하는 지금도 어떻게 해야할  대책이 서질 않은데 불행히도 나는 관조하거나 구경나온 사람이 아니라 당장 분필을 잡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열악한 여건을 많이 각오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한 열악함이라는 것도 순전히 상대적인 것이었다. ‘ 기준에서 열악한 것이지  기준이 이들의 기준과 비슷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는 것을 천막 안에서 허리를 굽혀 나오는 도중에 달았다.


도피 끝에 다다른 곳이 글씨 하나 읽기 어려운 어두컴컴한 천막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던지, 나는 내가 어디서 어떻게 수업을 해야할 지를 확정짓기 위해서 학교 관계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모든 건물이 다 부서져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일말의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그 희망을 현실로 확정받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지나온 허허벌판의 모래에 발을 파묻혀 가며 그 곳을 거슬러 돌아왔다. 마침 저 멀리서 지난번에 교육청 관계자에게 소개받아 인사를 했던 교장이 교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의욕적으로 과목과 학년, 수업 시수를 정해야 한다며 시간표도 정하고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수업 준비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런데 교장은 전혀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기 이름은 있어요? 내가 하나 지어놨는데."


그러고선 그녀는 나를 위해 지어놓은 마사Masa라는 현지어 이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더니 어느새 지나가는 학교 관계자들한테 나를 그 이름으로 소개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사실 그 이름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교장의 고집은 딱 봐도 보통이 아니었고 첫 날부터 굳이 언쟁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학교 사정을 상세히 들어볼 요량으로 있지도 않은 사회성을 발휘해 그녀에게 말을 붙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무실로 들어가기 직전, 교장은 갑자기 입구에서 멈추어 서더니 말하였다.


"그럼, 잘 가요."


순간적으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나는 되물었고 그녀는 출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출장에서 언제 돌아오느냐, 내 스케줄을 오늘 정하고 여건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다며 이야기 했는데 그녀는 자신이 3일 뒤에 돌아올 것임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양 측 교육부 간의 협약문서는 물론 내가 어느 교육청 관할의 어느 학교로 임용되었는지도 적힌 문서도 직접 봤건만, 교장의 태도로 봤을 때 나의 부임은 하나도 시급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하다못해 자신이 중요한 출장이 있다면 적어도 교감이라던가, 누군가 대신 의논할 대리인이라도 알려주고 가야할텐데 그녀는 나의 질문에도 '교무실에 가면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라는 뜬구름잡는 대답만 해버리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무런 지시도 없이 가버리는 교장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동안이나 황망히 바라보다 일단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건물 입구에서 갑자기 풍채 좋은 여인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이 곳에 와서 느낀 가장 낯설었던 점 중 하나인데 길을 가다가도 모르는 사람끼리 인사를 하고, 처음 본 사람이라도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반가워하며 인사를 하고 대화를 하기도 한다. 분명 초면이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인사를 건넨 그녀는 반갑다고 말하며 갑자기 포옹을 하자는 제스처를 취했으며 나는 어리둥절해 하며 이미 그녀의 품 속에 있었다. 그녀는 넉넉한 풍채만큼이나 나를 격하게 껴안았다. 내가 일 년 후 한국에 간다해도 엄마 아빠가 날 이 정도로 안아줄 것 같진 않았다.


교무실 건물 입구


"날 엄마처럼 생각해요."


그 여인은 나를 교장실로 데리고 들어가자마자 대뜸 저렇게 말하였다. 그녀는 몇 번이나 나에게 극진히 인사를 하였고, 도심 속 거리에서 프리 허그 캠페인을 하는 사람처럼 나를 여러번 껴안아 주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봐도 별 이유가 없었고, 나는 그녀가 교장을 대신해서 환영을 표현하는 교감이 아닐까 생각했다.


"과목, 학년, 시간표를 정해야 해서요. 누구와 의논하면 될까요?"


"여기서 편하게 기다려요. 곧 올 거에요. 편하게 있어요, 내 집처럼 편하게."


그녀는 거듭 그렇게 말하며 나를 의자에 앉혔다. 우리의 모든 대화는 영어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날 엄마처럼 생각하라', '내 집처럼 편하게 있으라' 라는 말들이 한국의 관용어구 같아 소소한 웃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고선 그녀는 어디론가로 나가버렸는데, 나는 월요일 아침이라 오자마자 해야할 일들이 많겠거니 하며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가 말한대로 '내 집처럼 편하게' 있다 못해 의자에서 흘러내리기 직전이 될만큼 시간이 흘러, 첫날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긴장감이 사라질 때까지도 교장실엔 사람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 교장은 오자마자 나를 토스해버리고 가버리지, 교감같아 보이는 사람은 격한 환영 인사만 하고 실무적 이야기는 하지도 않고 가서 돌아오지도 않지. 아무리 그래도 첫 날, 손님 격인 사람을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공간에 혼자 앉혀두고 이렇게 오랫동안 '방치'할 수 있는 걸까. 시계를 보니 벌써 기다림은 2시간이 넘어가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올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팔과 다리를 쭉 뻗고 등과 목을 의자 위에 기대어 한껏 젖혔다. 자원봉사를 왔지만 아무도 환영해주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는 이 순간, 나는 도피자의 운명을 직감했다. 자원해서 왔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자. 떠나기 전의 막연한 상상처럼 내게 펼쳐질 생활이 좋은 일을 하며 인류애를 느끼는 자원봉사가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강력하게 들었다. 나의 존재란 그들에게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왔는지조차도 모른 채로 이렇게 나를 방치할 수가 있을까? 잘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일, 힘든 일을 자처하고 나선 사람을 맞이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


쉴새없이 돌아가지만 시원한 효과는 하나도 없는 천장형 선풍기를 보며 나는 왜 고뇌 끝에 유학을 떠난 주인공들이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멋진 모습으로 돌아왔는지를 이해할 것 같았다. 그들은 도피를 해서 평화를 찾아 혈색 좋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분명 그들도 도피 끝에 다다른 곳은 더더욱 지리멸렬한 곳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닥쳐온 모든 것들을 다 이겨냄으로써 한 단계 성장한 것이었다. 이대로 있을 수 없었던 나는 누구라도 찾아 무엇이라도 하기 위해 교장실을 나서기로 했다. 최소한 내가 천막에서 수업을 하게될 지, 분필은 있는지 내 스스로 알아보는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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