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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Sep 01. 2021

아프리카로 도피한 두 여자


자식 두 명이 사회인이 될 때까지 남편 뒷바라지 하랴 집안 살림하랴 맞벌이 하랴 평생 쉴 틈이 없었던 50대 여성 H는 어느 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


“내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


당연히 모두가 반대할 것을 알고 있었던 H는 가족 모두의 반대에도 조바심을 내지않고 긴 설득의 여정을 시작했다. 아프리카에 관련된 책을 슬쩍 거실 위에 올려놓는가 하면, 아프리카 여행 다큐멘터리를 밤새 보고,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여행 작가의 강연에 몰래 가기도 했다. 남편은 분명 그것을 봤지만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한 곳을 영어도 안되는 사람이 혼자서 어떻게 가? 못 가.


가족들은 그런 반응을 걱정이라는 탈을 쓰고 노골적으로 보였다. 직장 동료와 지인들은 예의라는 이름 하에 별 말은 하지 않았으나 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만한 시선을 보냈다. 무엇보다도 아프리카로의 여정은 주말 동안에 인근 국가로 다녀올 수 있는 정도의 가벼운 기분 전환이 아니었다. 그녀가 아프리카에 가기 위해서는 지난 30년간 단 한번도 쉬어본 적 없었던 이 직장 생활에 잠시 쉼표를 찍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더욱 그녀가 아프리카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신 역시 그녀가 아프리카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직장이 있고, 여자이고, 자식이 있고, 남편이 있고, 나이가 많기 때문에? 그렇다면 조건 하나를 바꾸어 그 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는 지를 들여다 보면 된다. 바꾸었을 때 가장 파급력이 클 만한 조건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나이’야 말로 가장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요소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나이에 따라 직장, 결혼, 자녀의 유무 등이 크게 달라진다. 그렇다면 그녀의 나이를 약 30년 정도 줄인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사정은 크게 달라질까?


그 해답은 H가 그런 말을 듣고 있을 때로부터 약 1년 전으로 돌아가보면 알 수 있다. 약 30년의 세월을 낮춘 우리의 실험체 —그러나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는 이 글의 필자— 20대 여성 M은 H와 똑같이 어느 날 아프리카에 가겠다고 선언했고, 그 후 이런 말을 듣고 있었다.


니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거긴 니가 갈 만한 곳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없이 결정하지 말고.  


나의 모험기를 되돌아보며 지금 드는 생각은, 결국 내가 어떤 나이에 어떤 결정을 내리든 사람들이 보일 반응은 비슷할 것이라는 점이다. 안전하지 못한 선택에 대해서 주변에서는 반대를 한다. 그것이 걱정이든 비웃음에서든 감당해야할 리스크가 크고, 니가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며 말이다. 하지만 50대의 H나 20대의 M이 아프리카로 가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이란 사실 없었다. 그 두 여자는 단지 절박한 어떤 하나의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젊은 나이에 사회에 발을 내딛은 M은 무엇 때문에 그리도 절박했고, 인생의 모든 과업을 다 착실하게 달성한 중년 여성 H는 무엇때문에 절박한 심정으로 도피를 꿈꾸었던 것일까.


나는 아직까지 ‘도피’만큼 도피적인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다. 도피의 유의어를 몇 가지 떠올려 봤지만 탈출, 도망 정도의 단어 말고는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단순하게 어디로의 탈출로 규정하기에 도피는 좀 더 파괴적인 속성을 지녔다. 탈출이라고 하면 억압된 어떤 상태에서 좀 더 자유스러운 상태로 탈바꿈하는 성공적인 도망이지만, 도피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도피란 억압된 공간에서 나오긴 해도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도망이다. 그러니 도피란 기껏해야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잠시 콧바람을 쐬는 정도이지 결국은 내가 속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더 심한 경우 외면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한다는, 그런 비극적인 결말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다. 내가 아프리카로 가겠다고 말했을 때, 아마 이 세계 사람들은 내가 도피를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가 속한 세계의 특성을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만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에서부터 대한민국에 공무원 열풍이 불었는데 그건 이 나라에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기에 괜찮은 직업으로서 '대기업'과 '공무원'이라는 두 단어가 영혼의 쌍둥이가 되면서 부터다. 공기업도 마찬가지로 앞에 '공'자가 붙은 공노비들이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이렇게 불안한 현대사회에 극도로 보기 드문 고용 안정성과 워라밸이다. 나는 여기서 공무원의 삶이 얼마나 고용 안정성과 워라밸이 실제로 얼마나 보장되는지에 대해선 논하고 싶지 않다. 아마 모두 예상하다시피 같은 공무원이라도 업무와 상황 따라 워라밸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해 깊은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 말고 근본적으로 공무원이라는 직종, 나아가서는 모든 직업인이 가지고 있는 ‘선택’의 문제이다.


우리는 흔히 퇴근 후의 시간을 자유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어떤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퇴근 후의 시간마저도 철저히 구속당한다. 나 역시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자유(라고 생각한) 시간 동안 무언가를 배우고, 사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다니고 하던 것을 좋아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즐겁고 만족스러운 그 시기는 딱 1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니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감정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나는 사실 자유를 누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월급이 허락한 작은 유희를 즐기고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월급이 허락한 작은 유희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미래에 순응한 채로 소소한 재미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을 뜻한다. 정답을 정해놓은 한국 사회와 정해진 답을 골라야 하는 한국식 교육에 잘 길들여졌던 나는 직업에서도 정답을 골랐다. 다른 의심의 여지 없이 찬란하고도 안락해 보이는 삶.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마 이 이야기는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나는 앞으로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하게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것에 내가 이렇게까지 절망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월급이 허락한 작은 유희. 퇴근 후에 무언가를 배우고, 사고, 맛있는 것을 먹고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는 것. 그런 유희를 처음 즐길 때는 만족스럽고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근본적으로 저런 행위들에 대한 만족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런 작은 유희들은 대체로 하는 동안에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나의 내면의 무언가가 강렬하게 변하는 모험은 아니었기에 무엇이든 곧 시들해졌다.


그런 작은 유희에 도저히 만족할 수 없다면 결국 공략해야할 것은 단 한가지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내 모든 시간을, 그리고 앞으로의 일생을 오롯이 쥐고 흔들고 있을 ‘내가 속한 세계’! 하지만 모든 종류의 직업은 애석하게도 변화와 모험을 가로막는 장벽들이 있다. 저마다 다르고 워낙 높아 보여서 과연 이런 위험까지 감수해야하나 싶고, 굳이 해야할까 고민해보면 아리송하다.


내 직업은 여러 환경에서 일해볼 기회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으며, 경력을 살려 이직을 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평생을 가두리 양식장에 갇혀서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양식장에 정기적으로 제공되는 먹이와 천적 없는 삶을 사랑한다면 문제가 안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월급이 허락한 작은 유희발이 끝나갈 무렵, 나는 양식장 너머 저 망망대해가 그렇게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관성의 세계를 깨고 그 밖으로 나가보기를 꿈꾸었다. 절망감이 극에 달했을 때 나는 우연히 한 공고를 보았다. 국립국제교육원에서 해외 파견을 갈 교사를 모집하고 있었고 만약 선발되면 가게 될 곳은 제 3 세계 개발도상국,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나라들이었다.


이렇게 나이가 어린데 어떻게 이 프로그램을 알고 지원했습니까? 지금 선생님 경력에는 이런 게 있다는 것 조차도 알기 어려웠을 텐데요.


나는 면접장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고, 나는 내가 했던 대답을 밝히기 보단 H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이젠 나의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H는 내가 대학교 때 했던 멘토링 프로그램으로 알게된 분이다. 그 때만 해도 그녀는 나 사이에 있는 약 30년의 세월이 더 크게 느껴졌기에 그녀와 친구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너그럽게 모든 것을 이해해 주시는 좋은 선배 선생님이셨던 그녀와의 연락은 대학 졸업 후에 자연스럽게 뜸해졌다.


그녀와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것은 내 SNS에 올라간 프로필 사진 한 장 덕이었다. 그녀는 사막에서 찍은 내 프로필 사진을 보고 어디로 여행을 다녀온 거냐며 물었다. 그녀는 내가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아니고, 아직도 거기에 있으며 심지어 올해가 다 갈 때까지도 거기에 있을 예정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아마 그녀는 다른 곳에서 일해볼 기회가 거의 전무한 이 직업에서 어떻게 나라를 바꾸어서 일을 하고 있는지부터가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녀가 인생에서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녀는 그 후로 부쩍 자주 나와 연락을 하게 되었는데, 그 때마다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아프리카로 떠난 후 오랜만에 연락이 다시 닿게 된 사람들 모두가 한번씩은 '나도 가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누구라도 궁금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모두 말 뿐이었고 실제로 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나도 H가 정말로 이 땅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가 아는 누군가가 나를 보기 위해서 이 곳에 올 것이라고 믿지 못했다. 내 자신이 절박함 끝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틈에 살게 되었으면서도 내 주변인이 내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을 기회 삼아 우리가 살던 세계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까지는 믿지 못한 것이다.


그녀와 연락을 계속 하다보니 그녀가 이 곳에 오고 싶다는 소망이 단순 여행이나 관광 때문이 아니란 것을 알았고, 그와 동시에 그녀가 아프리카행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녀의 목적은 '홀로' 아프리카에 가는 것 그 자체에 있었다.


그녀는 23살부터 50대가 되기까지 단 한 차례도 직장 생활을 쉬어본 적 없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그 해 가장 큰 고비를 겪는 중이었다. 수십 년 지킨 교실인데다 별 학생 별 학부모 다 만나봤다고 자부하는 그녀인데, 교실에 가는 것이 두려워졌고 숨을 쉬기조차도 힘들어졌다.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 갖은 방법을 강구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편은 여느 때처럼 학기를 마친 후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면 기분 전환이 될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근 30년의 직장 생활로 얻게 된 직장인의 사이클이 몸에 배어 관성이 되었으니 그대로 버틸수도 있었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아마 그녀가 그대로 버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동안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어도 여태 잘 버텨냈기에 또 그럴 것이라 모두가 믿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남들이 보기엔 월급이 허락하는 작은 유희를 누리고 있었고, 사회에서 해야만 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다 해나가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선을 알았기에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 저편에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월급이 허락한 작은 유희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직업을 바꾸기엔 너무도 큰 리스크가 따라 붙었으며, 얼마 안 가 가정을 가진 후에는 사회는 그녀에게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직장인으로서, 며느리로서 해야 하는 각종 것들을  물밀듯이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이 직업의 특성상 오랜 기간 동안은 어떤 도피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H는 사람들의 말대로 자신이 버티자면 버틸 수 있다는 것 쯤은 알았다. 유지해야만 하는 일상과 월급이 허락하는 작은 유희의 관성으로 살던대로 살 수는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번에도 그랬다간 자신이 완전히 망가져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H는 30년에 가까운 자신의 직장 생활에서 처음으로 휴직을 신청해 모두를 놀라게 하더니 너무 머니, 언어가 안 통하니, 치안이 불안하니 어쩌니 해도 홀로 그 먼 길을 왔다. 결항, 지연이 잦은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것만 해도 벅찬데, 수도에서도 또 무려 8시간 동안 버스를 타야 하는 대장정이었다. 내가 사는 지역은 관광할 거리도 딱히 없고 수도처럼 편리하지도 않은 곳인데, 그녀는 오히려 그런 곳을 원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미지의 땅으로 가서 그저 사람들 사는 모습을 보고, 걱정없이 하루를 보내고 싶어했다. 그녀의 사연으로 짐작할 수 있겠지만 H가 이 곳에 온 것은 무언가 대단한 구경을 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 곳에 와서 보고 싶었던 것은 본인이 두려움을 극복해낼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 뿐이었다.


H는 도착한 바로 다음 날부터 동네 산책을 하며 마을 이웃들을 만났다. 빵을 만들어 파는 아낙과 이야기하다가 빵을 사오기도 하고, 바로 집 옆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는 학생들과 바디랭귀지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만난 사람들은 대체로 이방인에 대한 관심만큼 환영한다는 뜻을 보였고, 나에게 ‘엄마’가 오신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 때마다 고개를 저으며 마이 프렌드라고 답했다. 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H와 함께 밥을 지어먹고, 해가 넘어갈 무렵엔 함께 장을 보고 돌아왔다. 마당에 캠핑 의자를 들고 나가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던 밤과 동틀녘 쾌청한 공기와 함께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던 새벽이 우리 모두에겐 잊을 수 없는 한 때가 되었다.


그녀가 내 집에 머무는 동안 짧은 방학이 있었던 나는 그녀와 세계 최대의 습지인 오카방고 델타로 여행을 떠났다. 건기가 끝나가고 우기는 아직 오지 않았던 때였으므로 물이 없어 야생동물을 보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중적으로 가는 루트보다도 더 위로 올라가 오카방고 델타에서 나룻배를 타기로 했다. 내가 힘들게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가이드를 구한데다 성수기도 아니었으므로 그 곳엔 정말 외지인이라곤 (사실은 사람이라곤) 우리밖에 없었다.



하늘엔 먹구름이 살짝 끼어있어 다행히 그리 덥지 않았다. 노 젓는 소리, 물 소리, 풀이 사각이는 주변 소음 속에서 나와 H가 말하고 웃는 소리만 나룻배 위에서 울려퍼졌다. 그 때는 오카방고 델타에 수련이 피는 계절이었다. 늪지대 위를 가로지르던 덕분에 수련을 처음으로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그 부드러운 잎을 만지기도 했다. 가이드는 연꽃을 따서 이렇게 목걸이를 만들어주었다.



나룻배 위에서 H가 큰 소리로 웃고, 크게 말하고, 몸을 뒤로 젖혀 저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 편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았다. 가지 않아도 될 수 만 가지 이유와 사회적 반대를 무릅쓰고도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는 단 한가지 이유를 찾은 그녀는 여기서 웃고 있었다.


2주의 시간이 지나고, 나는 어느새 버스를 타고 수도로 돌아갈 H를 버스 정류장에서 배웅하고 있었다. 수도로 가는 버스도 하루에 2번 뿐인 이 외진 곳에서 그녀는 이제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처음엔 버스를 타는 것도 두려웠는데, 이젠 혼자서 다 할 수 있겠다고 했다. 나는 H에게 '이제 그 벽을 넘으셨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이번 해가 끝나면 한국에서 볼 수 있을 테지만 한동안 못 볼 사람처럼 우리는 꼭 끌어안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H의 눈에 고인 이슬을 본 것도 같다.


집에 돌아가는데 해가 뜨고 있었다. 여태 늘 있던 사람도 아닌데 일출로 적막한 집에 들어오니 집이 유난히 커 보였다. 울적한 마음에 일기나 적는 게 낫겠다 싶어 다이어리를 열었는데, 쪽지가 꽂혀 있었다.






무섭기만 하던 그 아프리카라는 대륙의 한 나라를 아시아의 어느 나라처럼 무사히 있다가 간다. 덕분에 용기내어서 함 와봤고, 또 용기내어 다른 일도 도전해볼 수 있는 힘을 얻은 2019년의 가을이다.


머문 2주간 시간이, 혼자 되돌아 보니 너무 벅차다. 울 일은 아닌데 울컥하네. 계절마다 시력이 뚝! 뚝! 떨어져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청력이 떨어져 우리말도 가끔 다시 묻는 이 나이 52에 내가 홀로 먼 이국 보츠와나에 오갈 수 있을까? 이것만으로도 나에게 칭찬해주고 싶은 새벽이다.


씩씩하게 여기서 살아내는 모습, 처음부터 여장군도 아닌데 헤쳐나가면서 잘 지내가고 있는 모습이 참 이쁘고 기특하다. 대한민국의 딸로서 충분히 최선을 다했다. 컴백하는 날까지 건강하게 지내다 오삼.


See you!


2019.10.30 새벽에





사람들은 내 도피에 이유를 물었다. 나는 그에 대한 이유로 이미 모든 것이 정해져 있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내 미래가 싫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사회 생활은 그런 류의 이야기가 쉽게 오가는 장이 아니기에  ‘그냥 궁금해서’ 간다고 둘러댔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말하면서도 마음 속으로는 웃지 못했다. 사람의 인생엔 꼭 쉼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듣긴 하지만 실제로 쉼표를 스스로 찍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쉼표같은 건 찍고 싶지도 않다. 남들은 비바체로 전력질주를 하는데 나 혼자 쉼표를 찍다간 쉼표가 마침표 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의 아프리카 행은 인생의 쉼표를 찍는다는 그런 낭만적인 느낌이 전혀 동반되지 않았다. 나와 H 너무도 절박한 마음에 도피하는 심정으로  곳으로 떠났다.  직업적 상태를 그대로 유보한, 고작 1 간의 도피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유별나게 여겼다. 온갖 걱정이 오가는 그런 말들이 기분이 나쁘거나 오지랖이라기 느껴지기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아와야만 하는 입장에 처한 우리는 도피할  있는 자유조차도 없단 말인가? 어차피 여기에 남아 있을 사람은  조금의 모험도 행하면 안되는가?


 모든 발언들의 기저에는 우리에게 도피할 자유가 있을 것이라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지난날이 담겨 있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행복해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다. 주변에서 당신의 결정에 반대를 표하는 것은 당신에게 딱히 악의가 있어서라기보다, 당신이 얼마나 절박한지   없기 때문이니까.


도피한 곳에 낙원은 없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래서 나는 도피한 곳에 낙원은 정말 없었는지, 그렇다면 낙원 대신 무엇이 있었는지 여기에 기록해두고자 한다. 앞으로 시작될 이 이야기는 흔히 모두가 욕망하는 대상을 체험했던 여름밤의 꿈 이야기가 아니라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한번도 볼 수 없었던 곳으로 도피한 끝에 마주한 이야기이다. 탈출할 수 없다 할 지라도 우리에겐 도피할 자유가 필요하다고 믿었던, 내 신념에 관한 시험을 이제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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