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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Aug 07. 2020

비오는 날엔 전파낭비를 하고 싶다



오늘이 입추라는데 하루 종일 유리창에게 개운해질 일은 없었다. 유리창은 계속 울기만 했다.

엄마는 에어컨과 보일러 중에서 고민하다가 보일러를 틀었다. 세상엔 이런 선택도 있다. 

비슷한 속성의 두 가지가 아니라 완전히 정반대의 두 가지를 놓고 하는 고민.


습기가 좀 사라지면 냄새가 가실까 싶어 보일러를 틀었다. 

따땃해진 바닥에 발바닥을 붙였다. 

온기가 필요하지 않은 계절에도 따뜻함은 언제나 기분이 좋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재즈 음악을 얹었다.

외출을 금지시킬 정도의 폭우에 집에 있어야만 한다면 

음악을 듣는 것 말고는 무슨 할 일이 있을까?


이제 나는 비오는 날 헤이즈의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멜로디와 엮이는 기억을 떠올리기가 싫고 

기억이 잡아당기는 감정에 빠지기가 싫어서다.


예전엔 온 세상의 소리를 다 막고 귀에 음악만 쩌렁쩌렁 울리게 했다. 

다른 어떤 것도 생각 않고 내 기억과 감정만 중요하던 시절, 

비오는 날 음악만 재생하면 다시 재현되는 영원한 순간 박제를 그 때는 좋아했다.


지금은 집에서 사그작거리는 소리, 지칠 줄 모르고 창문을 울리는 빗방울 소리, 관객없이 돌아가는 텔레비전의 소리를 지우기 싫다. 

지금은 지나가버린 추억과 상념보다도 내가 지금 이 곳에서 이 시간에 이런 것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텔레비전을 끄지 않고, 무명의 가수가 부르는 제목 모를 노래가 흐르는 스피커가 

좀 요란스러워도 볼륨을 줄이지 않고. 

이렇게 비오는 날이면 더 점층되는 생활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고 싶다.


인생에서 나에게만 들리는 BGM은 조금 줄이고, 원래부터 있었던 소리를 듣고 싶다. 

원래부터 있었지만 내가 나에 빠져있는 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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