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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Aug 08. 2020

덜 마른 빨래에 드라이기가 필요한 것처럼



1. 비가 쉴새없이 와서 그런지 빨래도 잘 안 마른다. 빨래를 개다가 수건을 만져보니 축축해서 접었던 것을 도로 폈다.



2. 빨래 말고 안 마르는 것이 한가지 더 있다. 내가 여유를 느끼고 싶을 때 하는 행동 중 하나는 머리를 감은 후 그대로 말리는 것이다. 아침에 샤워를 한 후 드라이기 같은 인위적인 바람으로 촉박한 시간 내에 머리를 말리고 직장으로 뛰어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심리다.



3. 하지만 지금은 드라이기로 말리지 않으면 정말 하루종일 머리가 마르지 않는다. 하루종일 머리가 젖은 채로 있다가 결국 드라이기를 들었는데, 그 날 드라이기를 5번 들었어도 머리가 온전히 다 마르지 않았다.



4. 덜 마른 빨래에게 시간을 좀 더 주고자 다시 건조대에 널었다. 건조대 너머의 창문에선 하루종일 흐렸다, 여우비가 왔다, 큰 소리를 내 창문 너머를 한번 보게 만드는 장대비가 오기를 반복한다. 이런 날씨에 빨래는 언제쯤 다 마르게 될까. 종일 습도가 90퍼센트가 넘는 날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미스터리는 실마리없이 그 기간이 너무 늘어져 스릴을 잃었다.  



5. 빨래가 언제쯤 마를까 생각하다보니 내 머리카락 말고도 언제 다 마를지 모르는 것이 하나 더 떠올랐다. 한 때 오랫동안 축축해져 있었던 내 마음이다. 사람의 마음에도 볕드는 날과 비오는 날이 존재해서 어떤 날은 재수없게도 홀딱 젖는다. 우산 같은 것을 준비할 새가 없을 때도 있다.



6. 마음이 마를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한데, 하필 그 때가 지금처럼 연일 비가 쏟아지는 날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괜찮을 수 있을지 감을 잡을 수 없다. 보편적인 위로로 건네지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장마 전선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사람에겐 별로 효과가 없다. 비 속에선 아무리 기다려봤자 축축한 마음을 말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7. 지금처럼 오랫동안 내 마음을 말려줄 태양을 보기 힘든 날이 계속 된다면, 그것이 설령 작위적이고 기계적이라 할 지라도 마음을 말려줄 드라이기를 들었어야 했다. 완전히 마르지 않고 방치해 놓은 것에는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 쿱쿱함이 밴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말이다. 받아들일 수 있는 눈물의 용량을 초과하면 마음은 촉촉을 넘어 축축해진다. 축축해진 마음이 말려 올라가는 동안에 피어난 곰팡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제거하기 힘들다.



8. 나는 왜 그 때 마음에 드라이기를 들지 않았을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줄 알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다. 운이 없게도 그로부터 태양을 다시 보기까지는 좀 오래 걸렸다. 빨래든 머리카락이든 너무 오래도록 마르지 않으면 드라이기를 드는데,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지 못했다. 슬픔을 떨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된다면 그것이 평소와 다른 행동이든,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든 그냥 다 해봤어야 했다.



9. 인위적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조금이라도 말릴 수 있는 노력이라면, 비록 그것이 햇살을 내려주지는 못하더라도 해볼만한 가치가 있다. 드라이기에 100퍼센트 자연건조와 같은 효과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적당히 말려서 언제쯤이면 마를지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는 정도만 되어도 다음 할 일로 넘어갈 수 있다.



10. 그래서 한 시간만 더 기다려보고 그 때도 빨래가 안 말라 있으면 드라이기를 들기로 했다. 평소엔 잘 그러지 않지만, 오랫동안 스며드는 습기를 방치해서 나는 퀘퀘한 냄새를 맡으며 나중에 후회하기가 싫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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