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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이김 Aug 26. 2020

오래된 편지함을 정리하며


1.

나에겐 초, 중, 고등학교 시절의 기록을 총 망라한 상자가 하나 있다. 내가 초딩이던 시절에 인기를 끌었던 판타지 소설 <룬의 아이들> 2부 데모닉 발매 기념 상자다.



2.

별로 튼튼하지도 않고, 지금 보면 옛날만큼 멋스럽지도 않은 그 상자를 여태 간직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걸쳐 그 소설에 빠져있었다는 일종의 기록이 되기 때문이다. 20대 후반에 접어드니 예전엔 사소하다고 지각하지도 못할만큼 사소했던 사실마저도 중요해진다. 내가 예전에 이런 것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해놓은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잘 간직하고 싶다.



3.

상자보다 더 의미가 있는 것은 그 안에 빈틈없이 담긴 오래된 편지들이다. 소중한 편지들을 모두 감싸 안으려면 상자도 그만한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 한다. 찾을 물건이 있어 우연히 그 상자에까지 손이 닿게 되었는데, 엄마는 버릴 것이 있으면 버리라고 했다.  

 


4.

내가 찾는 물건이 없는 것은 분명했지만 오래된 편지들을 하나씩 읽어보았다. 그 속의 모든 편지들은 분명, 내가 과거에 받았던 편지인데 하나하나 읽어볼수록 마치 처음 읽는 듯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언제 이런 편지를 받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됐다. 기록을 보관하고 있던 그 상자만이 내 과거의 대변인으로 둥그러니 자리를 지킨다. 이 모든 편지들을 한 때 받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 과거의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같다. 그렇지 않고선 이렇게까지 기억이 안 날 수 있을까.  



5.

내 기억 속에서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가 많았다. 몇 통이나 되는 편지를 보고, 내가 언제 이 친구랑 이렇게 친했던가를 곰곰이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편지를 계속 읽다보니 알았다. 이 친구들은 나와 충분히 친해서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편지까지 써가며 내게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편지 속 친구들이 나에게 기울인 관심과 애정이 너무 감사하고 감동스럽기까지해서 걱정이 되었다. 과거의 민주는 이 친구들한테 이 친구들만큼의 정성으로 답장을 하긴 했을까. 그것조차도 기억이 안 나서 과거의 나에게서 또 한번 거리감을 느낀다.



6.

써두고 차마 전하지 못한 편지 몇 통도 있었다. 그런 편지들은 대개 너무 심각한 내용이거나 아니면 너무 시시콜콜한 내용이라 전달되지 못한 것 같다. 친구의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싫고, 이런 실없는 소리를 해서 편지를 주고받는 낭만을 깨뜨리기도 싫었던 과거의 나는 공들인 결과물을 과감히 포기하기도 했나보다.



7.

이젠 누군가의 편지를 망설임없이 걷어내기도 했다. 걷어낼 편지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이것을 버려야겠다고 결정하는 데는 고민이 필요 없었다. 옛 정을 생각하며 멈칫거리지도 않을만큼 그 친구들을 지워버린지 오래되었다. 어떤 것을 버리기까지 결심하는 시간은 무척 오래걸리지만, 막상 버리는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이다.



8.

버릴 편지가 이만큼이나 나왔다고 엄마에게 보여주니,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 몇 년 후면 거기서 또 버릴 수 있는 게 생긴다.


시간이 흐르면 무언가를 잊고, 누군가와 멀어지면서 더이상 보관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기록들도 많아지나 보다.



9.

내가 걷어낸 편지들이 이렇게 수북한데 시간이 흐르면 원래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될 지 모르겠다. 버려질 편지의 저자들은 내게 편지를 보냈었는지도 기억이 안나는 친구들이 아니라, 내 기억의 가장 끝부분까지 함께 했었던 한 두명이다.



10.

잘 기억나지 않는 편지는 살아남지만, 보낸 이를 강렬히 각인시킨 어떤 편지는 버려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는 내 것이 아닌 것 같아 내버려둘 수 있지만, 함께한 이가 생생한 어떤 과거는 현재의 내가 나가달라고 다그칠 수도 있다. 오래된 편지함은 창고 어딘가에 박혀 있는지도 모르게 잊혀져 있어야 하는 존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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