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혈앞이 준 소중함

언제 죽을지 아무도 모른다

by 오늘


어지럽다.

갑자기 배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모니터 화면이 흐려지고 있다. 급히 화장실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화장실로 내달린다. 복통과 함께 설사가 시작된다. 온몸의 근육이 배설물을 내보내겠다는 듯이 쥐어짠다. 경련이 온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복통이 오다 사라지다 반복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이 빠져버린다. 몸통에 힘을 주거나 허리를 들 수가 없다. 여차하다 휴지로 뒤를 닦지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온 정신을 집중해서 필사적으로 뒤처리를 한다. 나는 회사원이니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 뒷처리도 못하고 나갔다가 펼쳐질 끔찍한 상황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화장실 밖으로 나와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털썩 몸을 뉘었다.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서서히 복통은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손과 발이 꼬이기 시작한다. 덜컥 겁이 난다. 이 통증 뭐지? 이러다 죽는거 아닌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배속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 들어있는 것일까? 전에 이런적이 있었던것 같은데. 그래 꼭 비슷한 통증이었지! 간신히 손에 들고 나온 핸드폰으로 은지에게 전화를 건다.


“은지야 복도로 나와줘. 최대한 빨리!”


지난번처럼 입까지 마비되면 안 된다. 은지에게 손을 주물러 달라고 한다. 백지장 같은 은지 얼굴이 엄청나게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선생님 무슨 일이에요!”

“손! 손!”


아직 어지럽다. 은지가 손을 주무른 지 30분쯤 지났을까? 이제 몸을 좀 들어 올릴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유선 씨도 나왔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얼굴에 핏기가 좀 돌아오는 느낌이다. 아. 이렇게 죽을 뻔했던 30분의 시간. 마치 30시간. 아니 30일처럼 길고 고통스럽던 시간. 겨우 지나왔구나. 이러다 정말 죽는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나는 큰 한숨을 내쉰다. 온 몸에 긴장이 풀린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온 몸에 퍼진다. 삶과 죽음은 정말 찰나구나 하는 깊은 깨달음이 순간 다가온다.


“여기 이러고 있지 말고 더우니까 휴게실로 가서 누워있어요. 에어컨도 틀어줄게.”


유선 씨가 나를 어깨동무해서 휴게실까지 옮겨주었다. 머리도 엉망진창일 텐데 윗도리가 말려 올라가지 않았나...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체면 차릴 힘이 없다. 끌려가다시피 휴게실에 이불 위에 누웠다. 그때 은지와 유선 씨가 얼마나 고맙던지. 유선 씨도 저혈압 증세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설사가 아니라 계속 토하기를 반복한다 했다. 혈압이 낮아지면서 몸속 배설물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한다는 증상이었다. 어지럽고 혈압이 급속도로 떨어지며 힘이 빠지고 진땀이 한동안 계속 나온다. 혈액이 잘 흐르지 않으니 손발이 저리고 마비 증상까지 오는 거라고. 영락없는 저혈압 증상이었다.


나는 한 번도 쓰러져본 적이 없고 독감도 걸린 적이 없다. 입원도 해본 적이 없는 건강한 사람인데 갑자기 이렇게 쓰러지다니 겁이 났다. 많이 놀랐다. 물론 한 달 전 집에서 새벽에 똑같은 증상으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때는 '갑작스러운 설사인가?' 하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마비 증상까지 있었기 때문에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곧바로 정상적인 컨디션이 돌아왔기 때문에 병원에 가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저혈압 진단을 받는다 하더라도 저혈압 증세에는 약이 없기 때문에 평소에 혈압이 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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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도 낮은 혈압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항상 건강하다고만 생각했던 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저혈압으로 길 가다 쓰러지게 되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 짧은 고통의 순간 내게는 '보고 싶은 사람. 하고 싶었던 일. 못해서 억울한 것들. 먹고 싶은 것들'이 그토록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렇게 아픈데도, 죽음의 공포가 그렇게 나를 덮치고 있는데도, 오히려 생의 욕망은 더 강하게 꿈틀거리고 인생에 미련은 더 진하게 다가오고 있었다니, 재밌고도 슬픈 일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내 삶을 누리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온 마음을 다해 즐긴다. 그때 저혈압의 순간 '못하고 죽어서 억울할 뻔했던 일들'을 하기 위해 오늘 하루도 열심히 즐긴다. 매일 아침 열심히 실내 자전거를 탄다. 건강을 위해서 그동안 운동을 계속해 왔는데, 더 열심히 한다. 지금은 경남 양산에 살고 있다. 그 일이 있은 후 5년 동안 못 만났던 남동생을 만나러 서울로 갔다. 5년 만의 만남이라니 그것도 동생하고. 동생과 그동안 못했던 이야기들을 하다보니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10년 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친구도 만났다. 그동안 소홀했던 남편에게도 많이 사랑해 주고 아이에게도 더 많이 사랑해 준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눈에 보이고 피부에 느끼게 되었다. 직장에 다니면서 그동안 작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위해 하루 3개 이상 시를 짓고, 12월 초 출판사에 투고를 시작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나는 시인이다. 운이 좋았다. 2월에 시집 한 권이 세상에 나왔다. 내 이름으로 지은 책이 생기다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3월부터 지금까지 꿈의 도서관에서 시창작 시낭송 클래스를 진행하고 있다. 날아갈 것 같은 즐거움과 감상적인 일상을 산다. 지금은 에세이도 써본다.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하나씩 해 나간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운동을 하고,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여행을 한다. 블로그에 글도 쓴다. 블로그 이웃들과도 즐겁게 소통한다. 나는 비로소 이제야 삶의 생생한 맛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살고 있다. 지금 갑자기 죽는다고 해도 오늘을 즐거움으로 가득 채운 하루를. 또다시 내게 그런 저혈압의 순간이 오더라도, 조금 '덜 억울해하기'위해 나는 오늘도 삶을 채운다. 나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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